창세기
2016.06.04 17:58

(102강) 야곱의 자식 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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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3:6-10http://onlycross.net/videos/gen/gen-4306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6.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7.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8.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설교>

야곱이 있는 땅에 기근이 계속되고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도 다 먹게 되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다시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야곱의 말에 유다는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이 함께 오지 않으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전하면서 아버지가 베냐민을 함께 보내지 않으면 애굽에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말에 야곱은 ‘어찌하여 다른 아우가 있다는 말을 해서 나를 괴롭게 하느냐’라고 유다를 타박합니다. 그러자 유다와 다른 형제들이 야곱에게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7절)라는 불만 섞인 말을 합니다.

 

 

지금 애굽에는 시므온이 홀로 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애굽에 잡혀 있는 시므온 걱정보다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애굽으로 갈 수 없다는 아들들의 말에 더 괴로워합니다. 이처럼 베냐민에 대한 야곱의 마음은 42:38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는 야곱의 말에는 베냐민을 향한 마음이 어떠한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베냐민에게 재난이 미치면 자신은 스올에 내려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요셉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베냐민에 대해서도 다른 아들들과는 다른 편애의 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과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요셉과 베냐민이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야곱이 베냐민도 잃으면 자신은 죽은 것과 같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야곱이 있는 땅의 모든 상황들이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기근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하면 모두가 굶어 죽어야 하기 때문에 야곱도 할 수 없이 베냐민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거주하고 있는 땅의 상황을 왜 그렇게 힘들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일하심에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밖에서 바라본다면 기근은 얼마든지 있는 재난이고 기근으로 인해 굶어죽거나 양식을 구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축복이 아니라 징벌처럼 보이는 방향으로만 흘러갑니다. 이 모든 것이 배후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면 과연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이 형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애굽의 총리로 대한 것이나 형들을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씌워 옥에 가두고 결국 시므온을 남겨두게 한 모든 일들은 요셉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자신이 애굽으로 오게 되고 총리가 된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고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자신이 꾼 꿈에서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42:9절에서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하여 꾼 꿈을 생각했다는 것은, 형들에 대한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개인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그래서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씌운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범죄 한 것을 생각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게 된 모든 일들이 요셉의 핏값을 치르게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받지 않았다면, 그 일로 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리고 향제 중 한 사람만 옥에 갇히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죄의 깨달음과 그로 인한 괴로움과 자신들의 모든 상황을 핏값을 치르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각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요셉의 행동과 모든 일 처리가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의 아들들은 생존을 위해 움직입니다. 기근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굽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 가문의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니다. 요셉이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기에 형제들을 생존의 시각에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시각에서 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생존의 시각에서 대했다면 형제를 만났을 때 정체를 드러내며 곡식을 줘서 보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기근에서의 생존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야곱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지금 우리에게도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징계를 죄에 대한 징벌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요셉을 팔아 버린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무엇입니까? 기근을 겪는 것입니까? 기근은 야곱의 가문만이 아니라 온 땅이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징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히 12:6-8절을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고 죄로 인해 애통하게 하시며 심판이 당연한 우리의 본질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징계는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필히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징계는 생명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의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받은 징계는 무엇이었을까요? 육신의 가시로 불리는 질병이 있었지만 그것은 바울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성경이 말합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던 고난도 복음으로 인한 것이지 죄로 인한 징계의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의 징계는 자신의 죄로 인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애통해 하며 괴로워 하고 자신의 죄인의 괴수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죄로 인한 애통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신자에게는 징계가 있습니다. 비록 육신이 건강하고 삶이 평안하다 해도 그것과 무관하게 죄로 인한 애통이 있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징계는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아들들의 징계는 요셉을 만나고 정탐꾼의 혐의를 받으면서 죄를 생각하게 되고 죄로 인해 괴로움이 임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버리지 않았다면 없었을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야곱 가문의 생명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야곱이 자식을 편애하고 아들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결국 버려 버리는 모든 일을 그냥 두고 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한 괴로움을 알게 하시고 애통이 있는 백성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간섭은 우리를 생명의 구원으로 끌어갑니다. 죄를 알게 하시고 죄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징계가 있게 하심으로 나 같은 자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삶에서도 불안보다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평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복입니다. 이 복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행복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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