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6.18 18:10

(104강) 요셉의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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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4:1-5http://onlycross.net/videos/gen/gen-4401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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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2.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3.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4.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설교>

요셉과 형제들의 만남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우리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본문 역시 우리가 예상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오게 되고 요셉을 만납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만나자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 정도로 베냐민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즐거워하며 먹은 후에 형제들은 야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명해서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게 하고 전에처럼 각자의 돈을 자루에 넣게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요셉의 은잔을 넣게 합니다. 베냐민을 은잔을 훔친 도둑으로 모함하기 위해서입니다.

 

 

4,5절을 보면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요셉의 계획대로 베냐민은 도둑 누명을 쓰게 되고 형제들 모두가 다시 애굽으로 돌아와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왜 계속해서 형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일까요? 이것은 요셉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자신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시고 형들의 미움으로 애굽에 종으로 팔리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의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기감정과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베냐민을 만나고 안방에 들어가 몰래 울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도둑으로 모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들에 대한 요셉의 행동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43:11절에 보면 야곱이 베냐민을 데려가도록 허락하면서 예물을 가져가게 합니다. 예물을 보낸 의도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애굽 총리인 요셉의 환심을 얻어 베냐민을 무사히 돌려보내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의도는 예물로 인해 변동되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은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야곱 가문에 대한 하나님이 뜻과 계획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46:3-4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문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인도하여 다시 올라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가게 하셨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굳이 그렇게 하실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다시 올라오게 하시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겪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백성이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야곱 가문이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주한 채 큰 민족을 이루었다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할 자격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후에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악함이 드러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왜 계속 형제들을 모함하는 것일까요? 정탐꾼이라는 모함은 형제들로 하여금 요셉에 대한 죄를 생각하게 했고 죄로 인해 괴로움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베냐민을 은잔을 훔친 도둑으로 모함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베냐민이 도둑이라는 누명을 받게 되자 형제들이 옷을 찢고 성으로 돌아가 요셉을 만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 내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정직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악을 찾아 내셨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유다는 은잔을 훔친 일에 대해서는 정직하지만 요셉에 대한 죄에 대해서는 정직할 수 없는 자신들의 악함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잔을 훔치지는 않았지만 은잔을 훔친 도둑으로 모함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요셉에 대한 자신들의 죄악을 보셨기 때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유다는 자신들과 잔이 발견된 베냐민까지 노예가 되겠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악함을 생각하면 노예가 되도 당연하다는 자기 인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정탐꾼이라는 모함은 죄를 생각하고 괴로워하게 했고, 도둑으로 모함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면서 노예가 되도 당연하다는 인간의 실상에 눈을 뜨게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유다의 말에서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즉 회개는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애통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이 전부가 아니라 노예라는 신분으로 추락해도 당연한 악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회개는 자신이 구원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보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가 있는 신자라면 현재의 형편이 힘들다 해도 힘든 형편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부터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어려운 형편으로 끌어가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의도대로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기 존재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시고 현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놀라운 현실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 노예가 되겠다는 유다의 말에 요셉은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돌아가라고 합니다. 만약 요셉을 버릴 때의 형들이었다면 베냐민을 버려두고 떠났을 것입니다. 베냐민도 요셉의 형제로서 시기의 대상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베냐민을 잃었을 때의 아버지의 괴로움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요셉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도둑으로 모함하여 형들을 시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괴로움을 아는 아들이 되었는가를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신자가 죄를 안다면 구원에 합당하지 않은 자신을 위해 아들을 잃어버리는 하나님의 괴로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괴로움을 생각하게 된다면 신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신자로 세워 가십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이끌려 간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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