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6.25 17:42

(105강) 유다의 탄원

조회 수 233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창 44:32-34http://onlycross.net/videos/gen/gen-44323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2.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설교>

신자는 ‘무엇이 믿음인가?’라는 문제에 항상 관심을 두고 배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원하는 복을 받겠다는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서 겨우 주일예배에 성실하게 참석하고 교회 행사에 모임에 열심을 내고 십일조라는 것을 하는 것으로 믿음을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이 전부라면 그 길의 마지막은 저주로 끝날 수 있음을 주지하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잘 믿을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잘 믿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 외침 하나만으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지 교회를 향한 열정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야곱이 거주하는 땅에 기근이 계속되자 야곱은 다시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 곡식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베냐민도 보내게 되고 드디어 요셉이 베냐민과 상봉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형제들을 돌려보낼 때 이번에는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베냐민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씌웁니다. 이 일을 통해 드러난 것은 유다의 마음이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자신들과 베냐민이 모두 노예가 되겠다고 했지만 요셉은 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 같은 요셉의 말에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볼 것은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가라’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린 막내 동생이 홀로 이방 땅에 붙들려 종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형들이 평안히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베냐민만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가라고 한 것은, ‘너희는 본래 그런 사람들이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 버린 후에 평안히 아버지께로 가서 숫염소의 피를 적신 요셉의 옷을 보여주며 짐승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꾸민 그 때의 일들을 책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말대로 베냐민을 남겨 둔 채 돌아간다면 그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버릴 때와 달라진바가 없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요셉이 베냐민만 남기고 평안히 돌아가라고 한 것은 형들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요셉의 말에 대해 유다가 탄원을 하는데 그 내용이 18-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단지 베냐민을 살려달라고 탄원하는 것이 아니라 베냐민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내세워 호소합니다.

 

 

30-31절의“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는 이것이 야곱의 아픔을 내세워 호소하는 유다의 탄원입니다.

 

 

유다는 아버지에게 베냐민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어서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버지는 더 이상 살아계시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이 아버지를 슬프게 하고 죽게 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버릴 때는 자신들보다 요셉이 더 사랑 받는 것만 생각하고 시기했습니다. 요셉을 사랑하고 요셉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자신들보다 더 사랑한다는 요셉에 대한 미움과 시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픔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는 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았을 때의 아버지의 마음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대신 자신을 종이 되게 하고 베냐민은 형제들과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앎으로 해서 ‘베냐민 대신 나’라는 희생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희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유다가 아버지의 마음에 관심이 없거나 몰랐다면 베냐민이 홀로 남는다 해도 자신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희생은 자신의 의지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손해 보는 차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자신의 삶의 목표와 방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해서 희생을 알게 되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을 다말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38장에 삽입되어 있는데 37장과 39장을 보면 내용의 흐름상 다말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37장부터 요셉 이야기가 시작되고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린 일까지 전개되다가 39장에서 애굽에서의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38장에서의 다말 이야기는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말 이야기는 유다가 어떻게 해서 희생을 배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알다시피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한 일이 주요 내용입니다.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게 된 것은 순전히 유다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말 때문에 아들이 죽는다고 생각한 유다가 두 아들이 죽은 뒤 하나 남은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으려고 셀라가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다말이 창녀가 되어 유다와 동침한 것은 유다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에 비해 유다는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보다 아들을 잃게 되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로 인해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창녀와 같은 여인으로까지 스스로를 버려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다말에게서 유다가 희생을 배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 38:25-26절을 보면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한 것은 다말의 희생이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다말이 창녀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들이 베냐민을 데려 가지 않았을 때 아버지 야곱이 겪을 아픔을 생각하며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희생을 알게 된 유다가 야곱의 아들들에서 중심이 됩니다.

 

 

49:8절에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는 내용인데, 이상한 것은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내용대로 이해하면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에게 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요셉의 꿈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다 앞에 절한다고 하는 것은 유다가 보여준 희생정신을 따라 온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요셉의 꿈도 요셉이 보여준 희생을 세상에 나타낼 메시아의 오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희생 앞에 머리를 숙임으로 생명이 구원 받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에는 예수님을 버리신 아버지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을 아는 그가 예수님의 희생을 알고 머리 숙이는 신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48 창세기 (108강) 애굽으로 간 야곱 신윤식 2016.07.16 2515
547 창세기 (107강) 바로의 호의 신윤식 2016.07.09 2298
546 창세기 (106강)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신윤식 2016.07.02 2457
» 창세기 (105강) 유다의 탄원 신윤식 2016.06.25 2336
544 창세기 (104강) 요셉의 의도 신윤식 2016.06.18 2366
543 창세기 (103강) 잃으면 잃으리다 신윤식 2016.06.11 2234
542 창세기 (102강) 야곱의 자식 편애 신윤식 2016.06.04 2369
541 창세기 (101강) 요셉과 형제들의 만남(2) 신윤식 2016.05.28 2403
540 창세기 (100강) 요셉과 형제들의 만남 신윤식 2016.05.14 2635
539 창세기 (99강) 가나안 땅의 기근 신윤식 2016.05.07 2360
538 창세기 (98강) 풍년과 흉년 신윤식 2016.04.30 2416
537 창세기 (97강) 총리가 된 요셉 신윤식 2016.04.23 2448
536 창세기 (96강) 바로의 꿈 신윤식 2016.04.16 2366
535 창세기 (95강) 해석은 하나님께 신윤식 2016.04.09 2314
534 창세기 (94강) 옥에 갇힌 요셉 신윤식 2016.04.02 2647
533 창세기 (93강) 요셉의 형통 신윤식 2016.03.26 2571
532 창세기 (92강) 유다와 다말 신윤식 2016.03.19 2786
531 창세기 (91강) 야곱의 절망 신윤식 2016.03.12 2326
530 창세기 (90강) 버림받은 요셉 신윤식 2016.03.05 2423
529 창세기 (89강) 요셉의 꿈 신윤식 2016.02.27 3386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