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7.02 17:16

(106강)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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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5:1-8http://onlycross.net/videos/gen/gen-45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설교>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극적인 형제 상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형제들에게 복수할 의도가 전혀 없는 요셉에게는 극적인 상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요셉의 마음을 알지 못한 형들에게는 극적인 상봉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만남일 것입니다. 자신들의 미움과 시기로 팔아 버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요셉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형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만남에서는 정탐꾼이라는 누명을 씌웠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도둑의 누명을 씌워 베냐민을 홀로 종으로 잡아 두려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 형들이 아버지의 아픔을 생각할 줄 알고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으로 달라졌음을 확인하고 정체를 밝힌 것입니다.

 

 

요셉은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서 물러가게 하고 자신이 요셉인 것을 밝히고 애굽 사람과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리도록 방성대곡을 합니다. 요셉의 정체를 알게 된 형제들은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이 앞섰습니다. 자신들이 요셉에게 한 일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은 얼마나 놀랐는지 요셉이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라고 묻는데도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요셉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형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 후에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4,5절)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을 형들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된 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자기 인생에 대한 요셉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일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각과 믿음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다면 ‘누구 때문에’라는 말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초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에만 특별히 개입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개입이고, 야곱이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가게도 하시고 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삶이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얼마나 실감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하심을 핑계 삼아 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가령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이라면 형들이 요셉을 팔아 버린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요셉을 애굽에 먼저 보내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명목으로 요셉의 형들의 행동을 정당화해도 되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버린 일도 정당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룟 유다는 그 뜻의 성취를 위해 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지 않았으면 십자가의 죽으심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입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상인에게 팔아 버린 것은 분명 악한 행동입니다. 비록 요셉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여 버린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악입니다. 이러한 악은 결코 어떤 명목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다’고 하는 요셉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것은 인간의 악함마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고, 악함을 이용 하셔서 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7,8절)라는 말로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으며, 그 모든 것이 큰 구원으로 야곱 가문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 후손을 세상에 두기 위함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평탄치 못한 자기 인생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은 시각으로 인생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을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모든 일을 오직 은혜라는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이해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좋은 일은 선한 것, 좋지 않은 일은 악한 것이라는 선악개념으로 바라보면서 좋지 않은 일이 주어지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도 좋은 일에서 찾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정체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팔아버린 죄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말하면서도 형들에게는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고 하는 요셉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말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언약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증거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끝난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이후의 일은 우리의 믿음에 맡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하지 않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주어진 삶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믿음을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은혜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된다면 뜻대로 되지 않은 일도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일로 바라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해 분노하지 않은 이유가 요셉의 성품이 온화하고 온유하였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요셉은 야곱 가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음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형들이 자신을 팔아 버린 상황까지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만이 있어야 할 일에 불만이 없고, 분노할 일에 분노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 생명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되는 길로 인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십시오. 이 믿음이 여러분의 모든 삶에서 근심과 한탄보다는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우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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