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7.09 18:25

(107강) 바로의 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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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5:16-24http://onlycross.net/videos/gen/gen-45162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17.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18.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20.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21.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22.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23.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24.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설교>

신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삶으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아니한 힘든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납득보다는 원망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섭리 하시는 인생이라 해도 힘든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달라질 수 없는 믿음의 현실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옳으심을 믿고 의지하며 비록 불행으로 느껴지는 힘든 일이 주어진다 해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조금씩 경허하게 된다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비록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리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요셉은 그 모든 것이 야곱 가문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임을 알았기에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자신으로 인해 한탄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에 애굽에 오게 된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요셉이 형들과 극적인 상봉을 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바로가 요셉에게 너희 아버지와 가족을 이끌고 자신에게로 오라 합니다. 자신에게로 오면 애굽의 좋은 땅을 주고 기름진 것을 먹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의 말대로 형들에게 많은 물품을 줘서 보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으로 오면서 바로에게 이런 호의를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양식을 구해서 베냐민과 함께 홀로 붙들려 있는 시므온을 구해서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펼쳐진 현실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나게 되고, 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바로 왕의 환대를 받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현실은 요셉의 보복입니다. 사실 요셉이 어떤 보복을 해도 야곱의 아들들은 항변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신이 당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바라봄으로 모든 상황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바로가 야곱의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 호의는 요셉으로 인한 것이지 야곱의 아들들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 한 일을 바로가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야곱의 아들들이 바로에게 호의를 받고 돌아가는 것이나 요셉에게 한 일에 대해서도 전혀 추궁 받지 않은 일의 중심에는 요셉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에 보냈음을 알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임으로 형들에 대해 그 어떤 섭섭한 마음도 갖지 않음으로 그 모든 것이 호의라는 결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곱의 아들들에게 간증을 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할까요?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했더니’라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이런 호의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버린 요셉으로 인해 받게 되었습니다’일 뿐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의 행위로 인해 요셉에게 미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미움이 아닌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 마치 오늘 우리들이 입장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야고의 아들들의 입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애굽의 주라고 말했는데 애굽의 주가 되어 있는 요셉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들을 여전히 형제로 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잘한 것이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예수님께 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조차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자신을 버린 제자들을 다시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때문에 누구도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했더니’라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했더니’가 아니라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는 것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자의 고백일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바로가 야곱이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푼 이야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요셉이 아니라면 바로에게 그런 호의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근거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복은 인간의 공로와 무관하게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공로가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할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공로는커녕 날마다 세상을 좇는 욕망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나는 구원 받지 못할 악한 존재입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직시한 신자에게서 반드시 있게 되는 고백이며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복의 세계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그들 뜻대로 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간섭하신 하나님의 뜻은 야곱 가문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요셉이 버림받는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 역시 생명의 구원입니다. 이 뜻에 의해 예수님이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붙드시고 생명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간섭하시며 끌어가십니다. 때문에 비록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 해도 생명으로 끌려가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요셉이 형들을 돌려보내며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요셉이 왜 그런 당부를 하는 것일까요? 혹 많은 물품으로 인해 서로 많이 가지려고 다투지 말라는 뜻일까요?

 

 

다투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형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서로 다투지 말라는 말은 새 번역에서는 서로 탓하지 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들이 길에서 서로를 탓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짐작건대 요셉을 버린 일에 대한 죄책감일 것입니다.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며 호의를 받으며 요셉에게 한 일로 인해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서를 탓할 수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처음 계획은 구덩이에 던져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반대를 했고 요셉을 구출해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결국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유다가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고 합니다. 이것으로 서로를 탓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서로 다투지 말라고 한 것은 요셉을 만남으로 주어진 새로운 현실은 죄와 허물을 묻지 않고 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있는 새로운 현실이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호의를 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물으시고 우리는 받을 수 없는 호의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서로를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베푸신 호의에 대해 감사할 뿐입니다.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세계를 더 깊이 알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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