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9.26 17:34

(69강) 이삭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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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7:27-29http://onlycross.net/videos/gen/gen-272729394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39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설교>

 

이삭이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고 축복하는 내용이 27-29절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내용은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7-29절)입니다.

 

 

이삭의 축복을 보면 땅의 기름짐, 풍성한 곡식, 포도주, 그리고 만민으로부터 섬김을 받고 형제들의 주가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풍요로움과 만민의 주라는 높음이 약속되어 있기에 세상이 원하는 축복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형제는 혈육관계이지 주종관계가 아닙니다. 만약 형제들의 주가 된다면 그것은 형제라는 혈육 관계를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삭의 축복은 뭔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후에 사냥 갔던 에서가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을 축복을 야곱이 가로챘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자신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에서가 이해되십니까? 이삭의 축복에 집착하는 것은 에서도 야곱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축복에 집착하는 것은 당시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버지를 통해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울면서 축복을 구하는 에서에게 이삭은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37절)라고 말합니다. 축복은 모두 야곱에게 주었기 때문에 에서에게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에서는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뿐이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자신에게도 축복해 달라며 소리 높여 웁니다. 이러한 에서에게 축복한 것이 39-40절입니다.

 

 

에서에 대한 이삭의 축복은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입니다

 

 

에서의 축복을 야곱의 축복과 비교하면 에서의 축복은 사실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주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먼저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을 약속하는 야곱의 축복과는 분명 상반되는 것이고 풍요와는 달리 빈곤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누가 들어도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또한 에서는 칼을 믿고 생활할 것이고 아우인 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에서를 저주한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봐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삭의 축복의 내용도 하나님의 언약의 시각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야곱의 축복과 에서의 축복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한 내용을 보면 일반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축복한 것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축복이라면 에서에게도 야곱과 같은 축복을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복을 주었기에 에서에게는 줄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복은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이어지는 것이지 받고 싶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복에 대한 일반적 상식은 복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복은 야곱보다는 에서에게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 어쨌든 에서는 야곱에게 속임을 당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을 취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로 향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억울하게 축복을 빼앗긴 것입니까? 표면적으로는 에서가 억울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에서 역시 야곱과 다르지 않은 인간일 뿐입니다.

 

 

36절에 보면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자신은 야곱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옳고 야곱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도 에서를 그렇게 평가할까요?

 

 

히 12:16-17절을 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에서의 망령됨은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음행하는 자와 같이 말합니다. 즉 음행이나 한 그릇 음식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이나 망령됨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신부가 신랑을 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신랑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신랑과의 관계가 끊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만큼 신랑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도 장자에게로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보다 더 가치 없게 여긴 것이기에 음행과 동일하게 망령된 것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 살고자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팽개쳐지게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에서는 자신이 한 그릇의 팥죽을 선택하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이 야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배고픔을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망령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원인을 야곱에게 두는 것이 에서나 야곱이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러한 에서가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에서 이야기입니다.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버린 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 에서가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지 않고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흐리며”라고 말합니다. 축복을 이어 받는다는 것은 축복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시작해서 언약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시작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축복은 장자에서 장자로 이어집니다. 물론 야곱이 이러한 복의 원칙을 알고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장자가 복의 상속자라는 것 때문에 그 명분이라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리고 축복에서 버린바 된 에서는 지옥 갔다는 뜻일까요? 성경은 에서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에서를 세워 에서 같은 사람이 망령된 자고 하나님의 축복에서도 단절된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에서이고 하나님의 축복에서도 단절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에서 단절된 우리가 어떻게 축복에 참여한 자가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이삭의 축복인 것입니다.

 

 

야곱의 축복의 중심은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야곱의 형제는 에서 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은 야곱에게 이루어질 축복이 아니라 언약의 후손에게 이루어질 축복임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축복은 야곱에게로 이어지고 에서는 축복에서 단절됩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야곱의 축복에 참여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축복이 야곱에게로 이어졌다면 야곱에게 속한 자가 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된다면 형제들은 야곱이 주가 됨으로 해서 야곱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에서 단절된 자에게 진짜 축복은 축복을 이어가는 야곱에게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서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야곱의 축복은 요셉을 통해 드러납니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요셉에 의해서 형제들이 구원 받는 것으로 버림받은 자가 형제를 섬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주의 위치에 있는 요셉이 종의 위치에 있는 형제를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 25:23절에서 말하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는 분으로 오셔서 자신을 버린 자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것이 큰 자이신 예수님의 섬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에서 단절된 존재에서 예수님께 속한 자로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 매인 자가 되게 하셔서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한 말이 저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약 안에 감추어진 축복인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께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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