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10.03 21:21

(70강) 에서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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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7:41-46http://onlycross.net/videos/gen/gen-27414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46.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설교>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에서가 분노합니다. 41절에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 이삭이 죽을 때가 가까웠으니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야곱에 대한 미움은 컸습니다. 이삭도 곧 죽을 것이니까 야곱을 죽이는 일에 누구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서의 마음을 눈치 챈 리브가가 야곱을 불러 하란으로 가서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의 집에서 에서의 분이 풀리기까지 있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을 접하게 되면 ‘야곱이 나쁘다. 아니다. 어리석은 에서가 잘못이다’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잘잘못을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인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알아가는 신자라면 에서에게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야곱에게서도 역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알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알아간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거나 복음의 지식을 많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판단하던 눈을 자신에게로 돌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곧 나고 에서가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나쁜 놈이라면 자신이 곧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에서가 어리석은 놈이라면 자신이 바로 어리석은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신자는 누군가를 판단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판단하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이고 나 또한 주께로부터 판단 받을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리를 알아갈수록 ‘내가 악한 자이고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분노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어져야 할 이삭의 복을 야곱이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즉 에서는 자신을 이삭의 복을 이어갈 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삭의 장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에서에게 장자는 무엇으로도 바뀔 수 없는 질서였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든 형이 동생 되고 동생이 형이 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팥죽 한 그릇 받고 장자권을 팔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자권을 판다고 해서 실제로 에서 자신이 야곱의 동생 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에서의 분노가 이해되십니까? 인간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속임수를 쓴 것은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한가지의 사실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서든 누구든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의 분노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됨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순전히 아비의 복을 이어 받아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야곱이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삭에게 축복을 받고자 한 것도 에서와 동일한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서도 야곱도 동일한 존재이고 저와 여러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욕망에 이끌려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에서의 분노는 나보다 더 잘 된 사람에 대한 우리의 시기와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진리를 아는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자신의 복을 위해 부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복 주신다면 그 내용은 뭐겠습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생명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에게 최고의 축복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섬김으로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가 생명에 있게 된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복중에 있을 때 서로 싸움으로 인해서 리브가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고 하시면서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이상한 세계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에서와 야곱을 잉태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세상과 반대된 이상한 세계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세계에서는 큰 자 되는 것이 복일까요 어린 자 되는 것이 복일까요? 섬김을 받기 위해 큰 자 되는 것이 세상의 욕망이라면, 큰 자로부터 섬김을 받는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큰 자가 되지 못하고 어린 자로 존재한다 해도 섬김을 받는 복에 거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이러한 복의 세계를 알았다면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투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큰 자 되지 않아도 섬김을 받는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서의 분노는 하나님의 참된 복의 세계에 무지한 자의 분노인 것이고 야곱의 속임수 또한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정확한 의미는 큰 자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어린 자인 우리를 섬기신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외에 큰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큰 자이신 예수님의 섬김으로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섬김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게 된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큰 자, 작은 자는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자로 여김 받는다 해도 예수님의 섬김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소유나 성공에 관심을 두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관심에 관심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나의 관심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악한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진리가 알게 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실상입니다. 악한 영으로 살아가는 나의 실상을 보게 하심으로 감히 큰 자이신 예수님의 섬김을 받을 수 없는 나를 섬기신 예수님의 사랑만 남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자는 누군가의 믿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도 더 악한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신자 됨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더 채워야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완성된 충만한 인생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욕망은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것으로 충만한 삶으로 끌어갑니다. 이러한 욕망을 포기시키며 예수님이 곧 기쁨이고 충만이고 감사임을 알게 하고 증거 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결국 신앙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기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헛된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 대해 하나님이 행위대로 갚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심판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예수님이 섬기심으로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면 무엇 하나 성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을 잘 사는데 왜 나는 이것 밖에 안되나’라는 불평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이 같은 불평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 별 것 아닙니다. 때문에 내 믿음으로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의 불평과 분노가 다스려지게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는 자이고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을 증거 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내가 큰 자 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지금 보다 더 큰 자 되는 것으로 은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복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에서를 분노하게 한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복이 야곱에게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빼앗겼다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이 본래 에서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자신을 복을 이어 받을 자로 여김으로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많은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기억하셔야 할 것은 뭐가 주어져 있든 그것은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이 주어져 있다 해도 그 모든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 안에서 복이라고 할 수 있는 땅의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섬김 아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축복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이 은혜로 감사하게 되는 그가 땅의 것으로 인한 불평과 분노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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