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10.31 19:50

(73강) 변하지 않는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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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9:1-9http://onlycross.net/videos/gen/gen-29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9.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설교>

 

선악과 먹은 인간에게는 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담적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속성이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성은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말은 아담적 속성을 가진 어떤 인간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이 본성에 모든 인간이 장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 먹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아담이 바로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해 왔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도로 행한 수많은 행위들이 있겠지만 변할 수 없는 것은 항상 죄 아래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무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현실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임을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을 함으로 죄를 극복한다거나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다만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러한 착각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착각은 모든 종교에서 드러나는 공통적 현상입니다. 죄를 행위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행위적인 것은 얼마든지 고치고 개선하며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아담적 속성은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아실 것입니다.

 

 

불교가 고행을 하는 것은 몸을 힘들게 하여 속세를 향한 번뇌를 이기기 위함입니다. 번뇌에서 벗어나고 득도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의 방향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득도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한 아담적 속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행을 하며 도를 닦는 모든 것도 결국 죄 아래서 행하는 또 하나의 종교적 탐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로 인해 죄성이 나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죄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생활에 묻어나올 뿐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누군가가 교회를 다니더니 술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과 믿음으로 인한 변화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령과 믿음의 역사를 겨우 술 담배 끊는 것으로 보여주려는 유아적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성령을 받거나 하나님을 알게 되거나 신비한 체험을 하고 기적을 경험하면 변화되어 죄를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큰 착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야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가서 아내를 구하라는 부모의 명령에 따라 밧단아람의 하란을 향해 가다가 어떤 유숙하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야곱은 꿈에서 땅 위에 서 있는 사닥다리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야곱은 신비한 꿈으로 인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다시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게 됩니다. 드디어 하란에서 가까운 곳까지 도착한 것입니다.

 

 

야곱이 도착한 곳에는 가축을 기르기 위한 우물이 있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이 우물은 평소에는 큰 돌로 덮어 놓았다가 양떼들이 모이면 우물을 덮은 큰 돌을 옮겨서 물을 먹이고 다시 돌로 덮어 넣는 방식으로 이용 했습니다.

 

 

야곱이 그 곳에 있던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는지 묻습니다. 목자들이 안다고 답하자 야곱은 다시 ‘그가 평안하냐’라고 묻고 목자들은 ‘평안하니라’고 답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대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라반을 찾아가는 야곱으로서 목자들에게 라반을 아는지 물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반을 안다는 답을 들었을 때 다시 무엇을 묻는 것이 자연스러울까요? 라반의 집이 길을 가는 야곱의 목적지이기에 라반의 집이 어디인지 묻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반이 평안한지를 묻는 것입니다.

 

 

라반의 평안을 묻는 것이 안부를 묻는 것이라면 라반에게 직접 ‘평안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처음 본 목자들에게 라반의 평안을 물었다는 것은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함이 아니라 라반의 형편을 알고자 하기 위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아내를 구해야 하고 당분간 라반의 집에 있어야 하는 야곱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라반의 형편이 어떤지 궁금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야곱이 목자들에게 또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고 답합니다.

 

 

이 대화를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대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은 야곱의 인간성입니다. 해가 아직 높아서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는 야곱의 말은 다른 양 떼들이 돌아올 시간이 아직 멀었으니 당신들 양 떼부터 먼저 물을 먹게 하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는 것입니다. 해가 아직 높다는 것은 해가 저물 때가 멀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풀을 다 먹은 양떼가 돌아올 시간도 아직 멀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양을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야곱의 말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해가 아직 높은 자신의 양에게도 풀을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올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의 양을 위해 좋은 일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조언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그리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자신들에게 양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그들의 질서고 규칙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목자들은 자신의 양을 생각하기 보다는 목자들 세계의 질서와 규칙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야곱의 말에서 드러난 것은 질서도 규칙도 다 무시한 채 오직 내 양만 생각하는 습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평소에 행했던 야곱의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신비한 꿈을 경험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저오면 사람이 변화되기에 충분한 경험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경험으로도 야곱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도 야곱과 같은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들이 하나 같이 우리가 선악과 먹은 아담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해가 많이 남았으니까 너희들 양부터 물을 먹이라’야곱의 말을 가볍게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아예 죄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또한 아담의 속성으로 살아간다는 증거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속성은 우리에게서 사라지거나 개선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야곱이란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본성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의 깊이를 깨닫고 그런 자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자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게 되고 은혜에 이끌려 가는 것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것이 성령으로 인한 신자의 변화입니다. 은혜와 복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죄의 본성은 그대로이지만 죄를 죄로 보게 됨으로 인해서 자기 현실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끝까지 그 본성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참된 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뿐입니다. 자신의 악함의 자리에서 주를 보게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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