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11.14 15:14

(75강) 아들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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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0:1-8http://onlycross.net/videos/gen/gen-30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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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설교>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내 편이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처한 형편과 상황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며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옳은 것으로 인정해주시고 잘 되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당김으로 인해서 기독교인이 함께 하는 교회 내에 경쟁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여기게 되면 은혜 또한 나를 잘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세상에서의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하나님이 누구 편인지, 은혜를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현실이 더 낫고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타인보다 우월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승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일하실 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이나 은혜 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란 결국 탐심일 뿐인데 우리의 탐심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레아, 라헬과 결혼한 뒤에 자식 문제가 발생합니다. 29:3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아들을 주시는데 라헬에게는 자녀가 없게 하십니다. 레아가 하나님으로 인해 낳은 첫아들은 르우벤입니다. 레아는 르우벤을 낳게 된 것을 여호와께서 자신의 괴로움을 돌보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보라 아들이라’는 뜻의 르우벤으로 지은 것입니다. 자신이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러한 자기 처지를 돌아보시고 야곱을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레아와 같은 입장에 있다면 동일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그 괴로움이 해결될 수 있는 뭔가가 주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고 돌아보시고 도우시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다시 둘째를 낳고 여호와께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괴로움을 들으셨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듣다’라는 뜻의 시므온으로 짓습니다. 그리고 다시 셋째를 낳고 아들을 셋 낳았으니 야곱이 자신과 연합할 것이라 생각하고 ‘연합하다’라는 뜻의 ‘레위’라 짓습니다. 다시 또 넷째를 낳은 후에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면서 ‘찬양한다’는 뜻으로 유다라 짓습니다. 그리고 출산이 멈춥니다.

 

 

레아가 아들 넷을 낳는 동안에 라헬은 아들을 전혀 낳지 못합니다. 따라서 레아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아들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담기는 것입니다.

 

 

레아가 아들 넷을 낳는 것을 보면서 라헬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1절에서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말합니다.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한 책임을 야곱에게 돌리고 야곱은 성을 내면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라헬은 야곱에게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을 것을 요구합니다. 빌하가 낳은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라도 레아에게 지지 않겠다는 의도입니다.

 

 

결국 빌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라헬은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6절)라며 그 이름을 ‘심판하다’라는 뜻으로 단이라 짓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간주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여종의 몸에서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호소를 들어주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도대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푸시려고 아들을 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상황과 처지와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우리의 습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빌하가 또 다시 임신하여 둘째를 낳자 이번에는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라고 하며 이름을 납달리라고 합니다. 이때까지 레아가 낳은 아들은 넷이고 라헬은 자신의 소생은 없고 여종 빌하의 소생 둘만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라헬이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라헬은 자신이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합니다. 아마 레아가 출산이 멈춘 상태에서 자신의 뜻대로 여종 빌하가 아들을 계속 낳자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시는 것으로 여기고 이겼다고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출산이 멈춘 레아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레아 역시 자기 여종 실바를 야곱의 아내가 되게 하여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레아는 실바가 낳은 아들을 ‘복되도다’하며 갓이라 이름합니다. 하나님의 복이 여전히 자신에게로 향해 있음을 과시하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실바가 둘째 아들을 낳자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13절)라고 하면서 ‘기쁘다’는 뜻의 아셀로 이름 짓습니다. 모든 여자들이 자신을 행복한 자로 여기며 부러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다시 르우벤이 가져온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야곱과 동침을 하고 다섯 번째 아들을 낳게 됩니다. 레아는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18절)고 하며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여섯째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20절)고 하며 스불론으로 짓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라헬도 아들을 낳게 되자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하면서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뜻으로 요셉이라 이름 짓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하심으로 어떻게든 레아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입니다. 35장을 보면 결국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가 베냐민입니다.

 

 

이처럼 레아와 라헬의 아들을 낳기 위한 경쟁을 보면서 의문이 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경쟁을 묵인하시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아들을 낳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시고 잇사갈을 낳게 하십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이번에는 라헬을 생각하시고 소원을 들으셔서 요셉을 낳게 하십니다. 과연 하나님은 누구편이시고 누구를 도우시는 것입니까? 또한 레아와 라헬의 소원은 아들을 낳아 자기 위치를 확보하고 서로 지지 않으려는 경쟁, 탐심에 의한 것인데 그 소원을 들어주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니고 자기편입니다.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레아나 라헬의 소원을 들으셨다 해서 하나님을 레아, 또는 라헬 편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소원은 인간의 탐욕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으심으로 탐욕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는 자존심, 아들을 낳음으로 힘을 갖고자 하는 탐심, 하나님을 자신을 돕는 분으로 제멋대로 해석하는 무지함, 그 모든 것들이 레아와 라헬의 소원을 들으시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의 소원을 듣지 않으시고 아들을 주지 않으셨다면 본문과 같은 탐심과 경쟁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 주심으로 그 내면에 있는 탐심을 끌어내시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 뜻대로 된다고 해서 하나님을 내 편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든 안되든 우리가 드러내는 것은 탐심이며 이기려고 하는 자존심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늘 내 편이 되어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 된 모습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 됨에 있어서 나의 공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무능함이 인정된 자로 십자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레아와 라헬의 경쟁에서 이긴 자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만이 성취될 뿐입니다. 그래서 늘 이긴 자는 하나님 한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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