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11.21 16:49

(76강) 야곱의 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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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0:25-30http://onlycross.net/videos/gen/gen-30253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5.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27.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28.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29.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설교>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객관적 시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먼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고 주관적인 시각은 자신의 입장과 형편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객관적 시각과 주관적 시각의 차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자신의 입장과 형편이 기준이 되는 주관적 시각은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레아와 라헬의 자식 경쟁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레아와 라헬이 여종까지 동원해서 자식을 낳고 이름 지은 것을 보면 서로가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억울함을 들어주시고 승리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주관적 시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의 소원만 들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레아 편도 아니고 라헬 편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객관적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주관적 생각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 가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레아와 라헬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도 아니고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도 아니라 그들 소원에 담긴 탐욕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레아와 라헬의 소원은 아들을 낳아 야곱이 자신만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탐욕을 드러내기 위해 소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레아와 라헬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고 그들의 탐심이 곧 우리의 탐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처럼 힘 되는 것을 소유함으로 세상에서 자기 위치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죄가 곧 우리의 죄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25절을 보면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야곱이 라반에게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라반은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27절)하고 품삯을 정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라반이 야곱을 떠나지 못하게 붙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품삯을 정하면 주겠다고 한 것을 보면 그동안 라반이 야곱에게 품삯을 주지 않았거나 주었다 해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라반은 야곱으로 인해 번성해졌음을 알기 때문에 야곱을 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야곱은 계속 라반의 집에서 일해 줄 수만은 없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30절)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다시 야곱에게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고 하고 야곱은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야곱의 조건은 라반의 양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고, 염소 중에서도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어 자신의 품삯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의 조건을 수락하고 자기 아들들에게 야곱이 말한 대로 양과 염소를 가려내어 라반의 짐승이 있는 곳에서 사흘 길 쯤 되는 곳으로 데려가게 합니다.

 

 

라반이 자기 짐승과 야곱의 짐승 거리를 사흘 길 쯤 되도록 떨어지게 한 것은 혹여 자기 짐승들에게서 아롱지고 얼룩 있고 점 있는 것이 생길 것을 염려해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라반이 야곱을 보내지 않으려고 한 것도 탐욕이고 야곱과 라반의 짐승을 떨어뜨려 놓은 것도 탐욕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도 탐욕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라반의 양과 염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한 가지 계략을 세웁니다. 야곱의 계략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물 먹으러 온 양떼가 그것을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양 떼들이 물 먹으러 와서 그 가지를 보고 새끼를 배었을 때 얼룩얼룩하고 점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 것입니다.

 

 

또한 야곱은 튼튼한 양에게만 가지를 보게 했습니다. 튼튼한 양에게서만 아롱지고 점 있고 얼룩 있는 튼튼한 새끼를 낳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약한 양에게는 가지를 보게 하지 않음으로 약한 양을 낳게 하여 라반의 양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야곱의 재산이 번창하게 되고 야곱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야곱의 계략이고 탐심입니다.

 

 

창 31:6-9절에 보면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불러 라반이 자신에게 행한 일에 대해 말하면서 라반이 자신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편을 들어 라반의 양이 점 있고 얼룩무늬 있는 양을 낳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억울한 자신의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공평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양이나 염소가 나뭇가지를 본다고 해서 얼룩이 있고 점 있는 새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즉 나뭇가지에 그런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은 그런 방법을 사용했고 야곱이 의도한 대로 라반의 양과 염소가 새끼를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신의 의도대로 된 일을 하나님이 도우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되어진 일의 결과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야곱 편이십니다. 우리가 야곱의 입장이라 해도 동일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주관적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억울한 사람을 도우시는 분이라면 억울한 일을 겪은 모든 사람의 한을 갚아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설사 억울함을 갚아 주신다 해도 남의 것을 빼앗아 주는 방법으로 갚으실까요?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라반과 야곱을 화해시키는 것입니다. 라반에게는 부당하게 착취한 것을 야곱에게 갚게 하시고 야곱에게는 라반에 대한 마음을 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에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계략을 책망하시기보다 오히려 계략이 성공하는 것처럼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레아와 라헬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그들이 탐심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야곱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야곱의 계략이 성공한 것처럼 하시는 것은 야곱의 탐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야곱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야곱을 세워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일하시고 무엇을 위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가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을 책망하시고 서로 화해하게 하셨다면 남는 것은 도덕적 인간관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이 잘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나의 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드러나는 것은 탐심입니다. 탐심을 드러내고 탐심으로 가득한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증거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와 사랑으로 끌어가십니다. 은혜와 사랑에 무릎 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일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으로 차별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일의 잘됨이나 못됨과 상관없이 되어진 모든 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의 세계를 알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란 존재만을 생각한다면 야곱은 버림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현재의 자기 형편과 입장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삶에서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만 마음을 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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