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12.05 19:20

(78강) 드라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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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1:17-20http://onlycross.net/videos/gen/gen-31172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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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9.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설교>

 

야곱이 모든 가축과 재산과 자식과 아내를 데리고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기회를 틈타 도망칩니다. 22절에 보면 라반이 삼일 만에 야곱이 도망친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보면 라반의 양털 깎는 일은 삼일 이상 걸리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라반에게도 양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라헬이 야곱과 함께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합니다.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으로 가정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다는 것은 가정 수호신인 드라빔을 많이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드라빔이 없으면 집안에 재앙이 온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드라빔에 대한 생각은 라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라반이 야곱이 도망치고 드라빔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야곱을 추격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라반에게도 드라빔은 중요했을 것입니다. 드라빔을 잃는 것은 가정을 지켜주는 신을 잃는 것이고, 그것은 가정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 해도 신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드라빔을 훔쳐 가도록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라반의 집에 드라빔이라는 우상이 있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창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종을 라반의 집으로 보냅니다. 종이 라반과 아버지 브두엘을 만나 자신이 오게 된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 때 라반과 브두엘이 한 말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입니다.

 

 

이들이 이 말을 했다는 것은 여호와를 알았고 섬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도 역시 하나님을 신으로 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라반의 가정에 드라빔이 있었고 딸은 드라빔을 훔치고 아버지는 그것을 찾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드라빔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신을 찾는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라헬과 라반의 마음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드라빔에 집착하는 라헬과 라반을 보면서 신을 찾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라헬이 드라빔을 낙타 안장 아래에 넣었다고 말합니다. 즉 드라빔은 낙타 안장 아래에 감출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드라빔이 뭐라고 아버지와 딸이 서로 감추고 찾으려고 하면서 집착하는 것일까요?

 

 

드라빔을 단지 조그만 우상의 형상으로만 이해하면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드라빔이 없어지면 집안에 재앙이 생기고 복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훔쳐 가도록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을 에스겔에서는 음란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슥 10:2절을 보면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드라빔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드라빔이 말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드라빔을 집안에 두고 믿는 그 내용들을 드라빔이 말한 내용으로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드라빔이 말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지켜주고 재앙으로부터 지켜주며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허탄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신은 모두 우상이며 우상은 생명이 없는 것이기에 허탄한 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을 지켜주는 신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드라빔으로 여기는 허탄한 말이 될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위한 신이 우상이고 드라빔이라면 현대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은 드라빔일 뿐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믿음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드라빔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빔에 집착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드라빔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간음한 부정한 존재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잘 섬기면 복을 주겠다’거나 ‘재앙으로부터 널 지켜주겠다’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들은 드라빔의 허탄한 말일 뿐인 것입니다.

 

 

드라빔에 대한 라헬과 라반의 생각은 자신의 행복과 목표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드라빔이 인간의 존재를 알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드라빔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 행복해지는 것으로 향해 있고 그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목표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귀와 생각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고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말에 쉽게 수긍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셨다고 믿으신다면 지금 현재의 가정에 대해 만족하는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을 지키셨고 인도하셨음을 믿으신다면 현재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만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믿는 참된 믿음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도우셨다고 말하면서도 현재에 대해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신 하나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드라빔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시는 방향과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목적이 있기에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하나님, 드라빔을 포기할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재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현재의 형편이 어떻든 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말합니다.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도우시며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여러분 자신을 안다면 ‘받을 수 없는 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하나님이 지금까지 도우셨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감사는 ‘받았다’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받을 수 없는 나’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한 사람의 감사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용서의 은혜로 주어진 것들이고 이것을 믿는 믿음의 증거가 감사입니다. 이러한 감사를 배우게 된 신자에게는 내 가정과 나를 위해 어떻게 해달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아래 있는 것으로 되었고, 이미 주어진 모든 것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드라빔도 복을 빌어주는 복술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으로 삶에 부족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느냐고 묻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러한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이 믿음에 머물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구할 하나님의 인도와 지키심과 도우심은 믿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소원은 용서의 은혜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머물게 하는 복음의 말씀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뜻으로는 안되는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한편 강도가 강도로 구원 받았고 거지 나사로가 거지로 구원 받은 것처럼 죄인된 우리는 죄인으로 구원 받습니다. 구원 받았으니 사람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없는 구원에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드라빔이 무너지고 용서의 은혜가 굳건한 기둥으로 세워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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