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1.02 20:05

(81강) 야곱의 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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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2:24-32http://onlycross.net/videos/gen/gen-32243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설교>

지금까지 야곱의 행적을 따라오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야곱은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그의 행적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과 연관된 부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와지는 행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삶을 보면 ‘나는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것을 외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하나님은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말씀하신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 찾아오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곱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이유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인해 야곱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야곱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야곱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야곱에 대한 이야기는 야곱의 구원으로 종결되었다고 봐야 하고 따라서 우리가 야곱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는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셔서 씨름하시는 내용입니다. 아마 야곱의 일생에서 가장 많이 언급 돠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야곱을 찾아와 씨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씨름은 야곱을 위한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씨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야곱의 씨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 보면 거의 기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밤을 새워 하나님과 씨름하고 야곱이 이겼다고 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향한 야곱의 집념에 감동해서 져주신 것으로 이해하며 이것을 기도의 씨름으로 말하고 기도의 씨름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26절의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는 구절을 축복에 대한 야곱의 강한 집념으로 이해하고 29절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였다는 내용과 연결하여 야곱의 기도의 승리라고도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복음과 상관없는 종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기도가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기도의 씨름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은 아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무시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께 씨름할 것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셔서 시작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야곱의 씨름은 기도와는 무관합니다. ‘기도의 씨름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자’는 말이 기도를 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일 뿐이기에 이방인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야곱의 씨름에서 생각해야 할 내용은 무엇일까요? 지금 야곱은 에서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에 대한 에서의 감정을 풀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에게 에서에게 줄 예물을 택하고 그 예물을 종들에게 맡겨 에서에게로 보냈습니다. 에서의 화만 풀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야곱의 씨름에서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야곱은 예물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얍복 나루에 혼자 남았습니다. 홀로 남은 것은 여전히 자신에 대한 에서의 마음을 알지 못해 불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처럼 불안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공격을 받는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야곱의 씨름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와 씨름을 하신 것은 누가 씨름을 잘하는지를 겨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야곱의 본능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는지를 야곱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허벅지 관절을 치게 되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게 됩니다. 날이 새려 하자 “나로 가게 하라”고 하고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놔주지 않습니다. 여전히 축복을 향한 강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야곱이 “야곱이니이다”라고 답하자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 내용들을 보면 도무지 앞뒤가 연결이 안되는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 내용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야곱의 인간성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책임지고 살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에서 존재하는 일에 도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축복을 받아내고자 하는 집착입니다. 즉 축복에 집착하는 야곱을 만나게 되는 것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하는 것은 야곱을 지탱하는 힘을 무너뜨린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은 축복이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얻고,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채고,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봉사한 모든 일들이 원하는 축복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축복은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였고 그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기다리는 하나님은 자신의 축복을 이뤄주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하나님은 야곱의 힘을 무너뜨린 분으로 찾아오십니다. 야곱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생소한 하나님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신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생소한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심으로 야곱은 사라지고 이스라엘로 존재하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집착하며 세상에 축복의 의미를 두고 그것을 힘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이라면 이스라엘은 그 힘이 무너진 자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그가 참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 절게 된 존재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 오셔서 되어진 일임을 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전 야곱처럼 자신이 원하는 복을 주기 위해 오시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힘으로 삼고 지탱하고 있는 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분으로 오시는 분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다리를 절게 된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고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는데 멀쩡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힘으로 삼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으로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하나님을 만났기에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주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말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씨름에서 이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허벅지 관절을 친 것으로 씨름이 끝났고 야곱이 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자신을 향한 욕망과 집착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자 할 정도로 강하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야곱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생명이 보존 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것을 야곱은 30절에서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말합니다. 비로소 자신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야곱의 축복관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 된 것으로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축복은 어디에서 실감하게 될까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생명이 보전된 자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인해 누리게 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에 눈을 뜨게 된 신자는 야곱과 같은 우리의 욕망으로 인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힘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음을 고백하며 예수님만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삶의 방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인들을 야곱의 삶의 방식으로 끌어갑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고 기도로 승부하자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면 우리가 어떤 욕망으로 살아가는 가를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를 치십니다, 그것이 말씀이 있는 이유입니다.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야곱은 죽고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이스라엘로 새롭게 일으키시고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고백하는 신자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신 흔적이 있는 그가 이스라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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