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1.09 16:57

(82강) 엘엘로헤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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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3:18-20http://onlycross.net/videos/gen/gen-33182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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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설교>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을 보면 자기 스스로 사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삶을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겪는 삶은 충분히 불평과 원망으로 나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쁨과 찬송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보다 고난의 현장에서 증거 되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모든 행동은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믿음이 있으며, 그가 향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부끄러움은 내 안에 누가 사시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나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 또한 천국이 아니라 세상에 매인 이방인의 모습 그대로라는 사실이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위해 야곱을 택하신 것은 야곱의 삶에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께 선택되고 붙들린 자신의 삶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도 야곱의 인생이 야곱의 뜻대로 되도록 도우시겠다는 의도로 이해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에서도 이기고 라반도 이기는 자기 승리를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지만 그것은 야곱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구원을 위한 선택이라면 ‘넌 어떻게 살아도 구원 받는다’고 선언하시면 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 기쁜 말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야곱을 변화시켜서 구원 받을 사람답게 만들어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되버립니다. 즉 ‘야곱처럼 변화되어야 구원 받는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바울의 구원을 위해서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겪지 않아도 될 고난을 겪은 셈이 됩니다. 바로 천국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은 바울의 삶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건이 계획되어 있고, 그 계획을 실행해 가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셨다면 그것은 어떻게 살아도 천국 가게 하겠다는 일종의 보증수표가 아니라 여러분의 삶, 인생에 하나님의 일을 계획해 놓으셨다는 의미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붙들려 꼼짝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이고,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바울의 말에 동의되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 가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껏 자신의 뜻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자신의 뜻이 이뤄지도록 도우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야곱 인생의 주인은 야곱이었고, 오직 자신이 중심이 되는 인생을 꿈꿨습니다. 그러한 야곱이 세겜으로 와 제단을 쌓고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 것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한 야곱의 변화입니다.

 


33장에서 야곱에 에서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그와 같은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 있은 후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에서가 달려와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야곱과 입 맞추고 서로 웁니다. 야곱이 자신의 가족을 소개한 후에 에서가 야곱이 준비한 짐승 떼를 가리켜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고 묻자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에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족하니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에서의 거절에도 야곱은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10-11절)라며 강권하여 에서가 받게 됩니다. 

 


 예전의 야곱 같으면 어땠을까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고 이삭을 속여서까지 축복을 받아낸 야곱의 성향으로서는 라반의 집에서 20년 고생하며 얻은 소유를 강권하면서까지 에서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라는 야곱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전의 야곱이라면 이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소유가 족하다는 것은 더 이상 소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소유가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유의 양과 상관없이 족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난 결과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에서가 장자라는 것도 못마땅해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사서라도 에서의 위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에서를 주로 부르며 절을 합니다. 이것은 예전처럼 에서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어서 고개를 숙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에서와의 만남에서 두려움은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에서에 대한 야곱의 태도는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말씀드린 것처럼 에서를 경쟁자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 그로 인해 ‘엘엘로헤이스라엘’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얍복강 나루의 씨름에서 야곱은 날이 새려 하여 돌아가려고 하는 하나님을 붙들고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게 하시고 야곱에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에게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자신의 인생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고백을 왜 굳이 야곱 같은 인물에게서 받아내시는 것일까요? 야곱보다 더 인격이 훌륭한 사람에게서 그러한 고백이 나오게 하신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관심이 나에게 있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 있고, 내가 믿는 기독교에 있기 때문에 이왕이면 좀 더 좋은 칭찬을 받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구원이 인간의 도덕이나 행함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긍휼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 같은 인간을 택하신 것입니다. 야곱을 동생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도 야곱에게 있는 인간의 비열함과 욕망이 에서로 인해 모두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엘엘로헤이스라엘’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야곱에게 계획을 두고 일하셨음이 증거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형편에 불만이 없습니까? 왜 힘든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셨는지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부요하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그 덕분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되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환경이 신앙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지 않은 환경에서 어렵게 살아야 신앙이 보장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환경이 좋든 나쁘든 우리에게서는 죄가 드러납니다. 언제나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힘쓰는 죄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이 축복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선택한 신자의 인생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할 자로 택하지 않으셨다면 야곱은 에서와 경쟁하면서 오직 이기기 위한 길로만 갔을 것입니다. 이긴다 해도 결국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인생임을 모른 채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야곱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을 알게 된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축복이며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살게 됩니다. 때문에 여러분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실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여러분께는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일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안해하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평강이며 ‘엘엘로헤이스라엘’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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