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1.23 17:48

(84강) 벧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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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5:1-8http://onlycross.net/videos/gen/gen-35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설교>

 

많은 사람들이 사주를 봅니다. 기독교인도 사주를 많이 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주를 보는 이유는 한 해 동안의 운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사업은 잘 될지, 결혼은 할 수 있을지,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지 등등 인생과 연관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운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설사 역술가를 찾아가 사주를 보지 않는다 해도 종교를 가진 사람은 각기 자신이 섬기는 신을 찾아 한 해 동안의 운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현실에서 겪을 자기 인생에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인생 문제가 아니라 묵시의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묵시의 세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님이 다루시는 묵시의 세계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지,‘그들처럼 하면 복 받는다’는 땅에서의 인생과는 상관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거 하는 묵시의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고 땅의 일에 마음을 두고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이 마치 액운을 물리쳐주는 부적처럼 취급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 내막을 제대로 깨달으셨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은커녕 저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과 저주의 운명 아래 있는 여러분께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아가는 것이 묵시의 세계를 아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야곱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에서를 피해 도망치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겪은 일과 두려움 속에서 다시 에서를 만나고 세겜에서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야곱을 보고 있습니다. 야곱에게 사주가 있다면 그 사주는 결코 좋지 않습니다. 평생을 힘들게 살다가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해야 할까요?

 

 

세상을 기준하여 판단한다면 야곱의 인생은 행복하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인생에서 교훈 삼아 배울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복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위해 살아온 것이 야곱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함께 하시고 야곱을 인도하시는 묵시의 시각에서 본다면 야곱의 인생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야곱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게 됨으로 종교의 길에서 벗어나 믿음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자기 집안 사람과 자신과 함께 한 모든 사람에게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2절)고 말합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한 후에 벧엘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단을 쌓자는 것인데, 이상한 것은 왜 진작 이방 신상을 버리도록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여러 우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고, 자기 집안 사람과 함께 한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는 것은 야곱의 집안이 우상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진작 우상을 버리도록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으라는 말씀을 듣기 전까지 집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을 묵인했습니다. 묵인했다는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는 뜻이 아니라 우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이방 신상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버리라고 했을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방 신앙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이방 신앙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될 때는 집안 사람들이 이방 신상들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방 신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방 신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곧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버리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야곱의 생각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변화이고 야곱의 변화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일하신 증거이고 열매인 것 입니다.

 

 

32:11절에 보면 야곱이 에서로 인해 하나님께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라고 간구합니다.

 

 

야곱의 간구에 대해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의 씨로 하여금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인 만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야곱이 에서에게 해를 당하여 죽는 일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의 안위를 위해 야곱에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위해 함께 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야곱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가 아니라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지금 너에게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으로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에서로 인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30절에 보면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 한 후에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가 생명이 보전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 축복 또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자신 때문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야곱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아니라 언약으로 인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 신상과 다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입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만 잘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도우시고 원하는 것을 이루시며 평탄한 길로 가게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묵시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깊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삶에서 만난 하나님은 야곱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비록 재산을 많이 소유하게 되었지만 원하지 않는 결혼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라반을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대로 가서 정착하고자 했던 세겜에서는 디나가 욕을 당하고 아들들은 옳지 못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 하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야곱이 원하는 삶과는 무관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며 이방 신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세우고 언약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자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 신상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전히 세상에 집착한 채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종교인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를 야곱에게 주고 야곱은 그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귀고리는 왜 묻었을까요? 이방 신앙을 귀고리처럼 귀에 걸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귀고리는 자기 몸을 장식하는 장식품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신을 과시하는 용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귀고리로 자신을 치장하고 돋보이고자 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속성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 역시 복을 받아서 자신이 우월한 자리에 오르고 스스로를 과시하게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에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는다면 에서를 피해 도망치는 길에 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자신에게 복주는 자기 편이라 생각하고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벧엘이라고 이름 하였던 그 때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주하며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나타났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지만 야곱은 그 때의 야곱이 아님을 의미하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신 것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벧엘에서 다시 벧엘로 가게 하신 야곱의 묵시의 세계입니다. 묵시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그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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