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2.06 17:58

(86강) 베노니와 베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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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5:16-22http://onlycross.net/videos/gen/gen-35162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설교>

본문은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고 죽는 내용입니다. 아이를 낳고 죽는 일은 세상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에 특별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라헬이 죽는 상황이나 시기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는 것은 라헬에게는 더 큰 행복이 보장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다르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내인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 중에 막내이기에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할 것은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따라서 야곱도 막내아들과 함께 라헬과 행복한 인생을 꿈꿀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행복이 라헬의 죽음으로 인해 깨어진 것입니다.

 

 

라헬의 죽음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라헬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라헬과 상관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라헬의 죽음에 관심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라헬의 죽음이 막상 우리의 사건으로 다가온다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고도 남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고 많이 듣게 되는 말 중에 하나가 ‘이제 좀 살만한데 데려가셨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죽어야 할 존재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창 30:24,25절에 보면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라헬은 둘째 아들을 낳기를 소원했습니다. 요셉 하나만으로는 이미 아들 넷을 낳은 레아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라헬이 둘째를 가졌다는 것은 라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라헬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주신 대신 라헬을 데려가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라헬이 아들을 낳는 것은 라헬의 소원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만약 라헬의 소원을 들어 주셔서 아들을 주신 것이라면 말씀드린 것처럼 라헬의 미래는 죽음이 아닌 행복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죽기 직전에 아들을 이름을 ‘베노니’라 부릅니다. 베노니는 나의 슬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아들을 낳고 떠나야 하는 라헬의 마음을 드러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노니란 이름을 야곱이 “베냐민”으로 바꿔 부르게 합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뜻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출 15:6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말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에 구원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권능을 오른손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시 118:15,16절을 보면 “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라헬에게는 아들을 낳는 일이 슬픔으로 다가왔는데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가왔습니다. 야곱도 라헬의 죽음에 슬퍼했을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라헬이 죽은 후에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라헬의 죽음에 야곱이 슬퍼하지 않았다면 비를 세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라헬의 죽음이 야곱이 슬픔이 되긴 했지만 베노니란 이름을 베냐민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생각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야곱 자신의 아들이 아니란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육신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맞습니다. 다만 베냐민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 보내주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달라진 시각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해석하던 야곱이 자기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위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도 자신을 위한 아들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릇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냐민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뒤에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보면 베냐민은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것과도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가능합니다.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베냐민을 그릇으로 삼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뒤에 보면 요셉의 꿈으로 인해 형들의 시기를 받게 되고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수많은 일을 겪은 후에 국무총리라는 자라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때 야곱이 살던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어 야곱의 아들들이 식량을 사기 위해 애굽에 옵니다. 요셉은 시므온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볼모로 잡고 베냐민을 데려오게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돌아와 되어진 일을 설명하면서 베냐민을 애굽에 데려가야 한다고 했을 떼 야곱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

 

 

야곱의 고통은 자식을 잃는 것입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입니다. 요셉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있는 자식이었는데 베냐민도 애굽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하니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을 모두 잃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베냐민으로 인해 아들을 잃는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존재고 그 아픔을 마음에 두고 사는 존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이 중요했고 하나님 또한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덮어주고 위로해 주며 해결해 주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남기시고자 하시는 참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 되는 것으로 아들을 잃으신 아버지의 아픔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으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율법이고 아버지의 아픔을 마음에 두게 되는 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되게 하신 백성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정성과 열심과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것으로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정성과 제물로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 43:24절에 보면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괴롭게 한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 용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가 행한 일을 생각한다면 죄 용서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에 먼저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리신 아버지의 아픔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아프게 한 자들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할 말이 없는 것이고 무릎을 꿇게 될 뿐입니다.

 

 

1절에 보면 야곱에게 벧엘로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시는데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단 위에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십자가이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신 아픔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픔을 알게 하시고 마음에 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기적 체험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비록 라헬이 아들을 낳고 죽지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되어짐을 믿었고 슬픔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권능으로 일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믿은 것입니다. 베냐민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었기에 베노니를 베냐민으로 부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우리를 붙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입니다. 때문에 현재의 형편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모든 기준이 삶의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야곱에게 함께 하신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결과도 여러분의 변화로 드러납니다. 성품과 인격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변화됩니다. 내 위주로 살아가던 우리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아픔 앞에 면목 없는 자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내 위주로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을 도외시한 부끄러운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변화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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