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6.02.20 17:33

(88강) 야곱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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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7:1-4http://onlycross.net/videos/gen/gen-37010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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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설교>

에서의 족보 다음에 야곱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의 족보를 말하면서 그 대부분의 내용은 요셉의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족보는 자손의 번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에서가 어떤 여인과 결혼 하여 누구를 낳았는지, 그리고 그들은 또 누구를 낳았는지에 대한 것이 에서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고 말한 다음에 야곱의 자손이 등장하지 않고 요셉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46장에서 야곱 자손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은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야곱과 그의 아들들 곧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과”(창 46:8)라는 구절을 보면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가족의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의 족보는 에서의 족보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에서와 야곱의 족보가 다르게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가문이고 에서는 약속 밖에 있는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족보는 에서와 야곱을 대비하여 야곱, 즉 이스라엘의 존재성을 무엇에서 찾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 27:29절에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이 축복은 야곱 당대에 이루어질 내용이 아닙니다.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한다고 하는데, 야곱에게 형제는 에서 한 사람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삭의 축복을 성취하기 위해 누군가가 등장을 하는데 그가 바로 요셉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을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자로 부르시고 약속의 성취를 위해 요셉을 세우신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를 위해 등장한 사람이 요셉이고 요셉으로 인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이스라엘에게 성취된다면 이스라엘은 요셉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이어가는 것이 됩니다.

 

 

에서의 가문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린 것처럼 에서의 자손이 얼마나 어떻게 번성했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저주에 속한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저주가 세상에서의 번성과 발전, 그 모든 것을 의미 없고 헛된 것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을 이어가는 가문에게 역시 세상의 번성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이처럼 두 가문이 저주와 축복이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된 이유가 인간의 다른 점에 있지 않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에서도 야곱도 추구하는 복은 같았습니다. 야곱이 세상에서의 번성에 초점을 둔 축복을 구했던 것처럼 에서 역시 동일한 복을 추구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참된 복의 내막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축복과 저주로 나누어졌다면 그것은 축복이 인간성과는 무관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의 실상은 무엇일까요? 에서나 야곱이 추구했던 축복이 동일하고, 에서가 저주에 속한 자로 등장한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축복은 에서나 야곱이 추구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주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다면 신자는 자신의 삶을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신자와 신자 아닌 자를 다르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름의 기준을 세상에서 누리는 삶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가 신자 아닌 자보다 더 큰 부와 영화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믿음의 보람을 얻고자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감지하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믿음에 대해 불만이 있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참된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해도 자신의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 가문, 즉 이스라엘에 요셉이 등장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성취된다면 요셉의 존재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꾼 꿈으로 인해 요셉을 미워했고 죽이고자 합니다. 요셉이 자신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 내막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요셉이 존재하게 된 것이 축복이라면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존재하게 된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에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축복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더 부족하다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건져 내시고 생명에 속한 신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 안에서 여러분께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下-10)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신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존재 의미를 저울질 할 수 없습니다. 무명의 모습 안에 유명함을 간직하고 있고 죽음 안에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 됨의 가치임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그가 진심으로 복된 자입니다.

 

 

2절을 보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야곱에게 고자질하고 야곱이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여 채색 옷을 입힌 것으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의 가정이 평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헬과 레아의 갈등이 자식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가문이지만 에서의 가문에 비해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가정에 있을 수 있는 다툼, 미움, 시기가 야곱의 가문에도 그대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신자의 다름이나 복의 의미를 가정의 화목이나 부요 등에 둘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다름보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택에 담겨 있는 축복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축복에 기대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내심 한편에서는 세상의 것들로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가 복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참된 복의 세계만을 소망한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리스도의 함께 하시는 은혜 없이 우리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것이 믿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은 축복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1절에 보면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야곱의 현재 거주지는 가나안 땅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와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에서 나오게 하셔서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430년을 종으로 지내게 하시는 것일까요?

 

 

만약 야곱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스라엘로서의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 채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몸만 두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은 신자로서의 본질적 내용을 상실한 채 신자라는 호칭으로만 불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 신자는 신자일 수 없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에 은혜를 남기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을 가나안에서 나오게 하셔서 애굽에 거주하게 하시고 430년 후에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가나안 당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를 내용으로 담은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광야를 거치게 하시면서 그들 또한 애굽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심으로 심판이 당연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셉의 등장으로 야곱 가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축복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생이 진심으로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알지 못한 세상은 세상의 높은 자리에서 자신의 성공과 높음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의 결국은 저주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축복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면 신자는 세상에서 만나는 어떤 험한 길에서도 주를 바라보기를 주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이 길로 인도 받는 사람이며 이것이 신자 아닌 자와 다르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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