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5.02 20:26

(49강) 롯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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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9:12-22http://onlycross.net/videos/gen/gen-19122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3.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4.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5.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7.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설교>

 

믿음의 세계는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삶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당연하게 나타나는 것이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택한 백성에게 주셔서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에 믿음이 역사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는 죽은 자들에게 그 모든 것은 무시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의 사고로 납득되지 않는 것은 무시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는 여러 기적들을 부인하거나 과장된 것으로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계가 신비라는 것은 두 나그네를 보호하기 위해 약혼자까지 있던 두 딸을 대신 희생시키려고 한 롯의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롯의 행동은 세상적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 사고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롯의 생각이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비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12,13절에 보면 천사가 롯에게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고 말합니다.

 

 

롯은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천사가 말한 대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 전하며 일어나 소돔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멀쩡한 소돔이 멸망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농담과 같은 얘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못해 아예 일어나지 않을 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에 대한 사위들의 반응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노아 홍수 심판에서도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조롱했고 지금도 세상은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해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가 롯의 사위처럼 세상 끝에 대한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고 자신의 삶에만 몰두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롯의 사위와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고 진리로 받게 되고 세상의 끝에 대해 생각하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믿고 그 손에 이끌려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은 여러분의 뜻도 의도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마음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나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시는 주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동이 틀 때 천사가 롯을 재촉하며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롯이 지체하여 결국 두 천사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소돔에서 인도하여 성 밖에 둡니다. 도대체 롯은 왜 지체했을까요? 소돔의 심판을 듣고 믿었다면 지체 없이 성에서 나와야 하는데 지체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에 육신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아쉬움이고 미련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16절에서 천사가 롯과 그의 가족의 손을 잡아 성에서 이끌어 낸 것을 주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고 말한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스스로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한시도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진리의 길로 갈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요 무한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롯에게만 심판의 소식을 알렸을까요?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서 구원 받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소돔 전체에 심판의 소식을 알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롯의 사위처럼 농담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심판에 대한 롯의 사위의 반응은 세상의 반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구원의 길로 갈 수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롯의 사위처럼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고 웃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임을 생각한다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힘으로 삼는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천사가 말한 것은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멸망함을 면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롯은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며 천사의 말을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19,20절)라고 말합니다.

 

 

롯은 산으로 도망하기보다는 가까운 작은 성 소알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창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거주할 땅을 택하라고 했을 때 롯은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한 요단을 택하여 떠났습니다. 자신이 살 길로 물이 넉넉한 요단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롯이 천사의 말을 따라 산으로 가기보다 소알로 가기를 원한 것은 소알이 소돔을 대신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롯은 끝까지 자신이 살 길을 자신이 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롯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볼 때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힘이 있는 것을 택하여 그것을 피난처로 삼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생각합니다.

 

 

롯도 19절에서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푸셔서 생명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신이 살 길을 택하고 원하는 그 길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제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감사하며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되어진 것임을 고백한다고 해도 늘 추구하는 자기 인생이고 생존 문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은 산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롯은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고 재앙을 만나 죽을 것을 염려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우리 수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삶을 인도하신다고 하면서도 늘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진리의 길을 갈 수 없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 한 발자국도 우리 힘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주를 향해 나아가는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가도록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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