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5.09 19:55

(50강) 소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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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9:23-29http://onlycross.net/videos/gen/gen-19232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3.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설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과거의 사건으로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서 심판을 했다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과 불 속으로 던져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은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는 말씀처럼 세상의 악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오늘 우리에게도 현재적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시각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두 천사는 롯에게 심판에 대해 말하면서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심판을 받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미련과 아쉬움을 두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봄으로 인해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행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 된 것에 대해서는 뭔가 개운치가 않습니다. 롯의 아내가 크게 악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고 단지 뒤를 돌아봤을 뿐인데 소금 기둥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속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소돔에서 구원 받은 롯이나 두 딸이 롯의 아내에 비해 크게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롯이 원해서 소알로 갔으면서도 다시 소알에 거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애당초 천사가 말한 것처럼 산으로 올라간 일이나 롯의 두 딸이 후손을 이어가기 위해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차례로 아버지와 동침한 일들이 어찌 보면 롯의 아내보다 더 불신앙적인 행동으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왜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내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롯의 아내에 대해 동정심을 가집니다. 소금 기둥이 되어야 할 정도로 큰 죄가 아니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순종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롯의 아내처럼 세상을 돌아보지 말고 천국만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달려가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세상을 돌아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우린 매일 같이 세상을 돌아보며 삽니다. 롯의 아내가 바로 우리들 자신이며 따라서 우리가 소금 기둥이 되어야 할 존재들인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이야기는 그 행동을 두고 죄의 경중을 저울질하며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행동으로 죄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판단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 나올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소돔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소돔의 악함은 두 천사와 관계하겠다는 의도로 천사를 내 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소돔의 성적 문란을 의미하고 그것이 소돔의 악함이라면 그 당시 소돔만 심판을 받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돔 외에 다른 족속들 역시 하나님과 상관없이 악을 행하며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 된 것은 우리 자신이 이미 소금 기둥 되었어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역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이미 유황과 불에 던져졌어야 할 죄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롯의 아내나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심판의 자리에서 구출되어 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지 그 내막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구출되어진 일에서 나를 붙들어 심판의 자리에서 이끌어 내시고 구출하신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자 되게 하시는 것이 본문의 의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매일 세상을 돌아보다가 이틀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 꼴로 세상을 돌아보는 횟수가 줄어드는 식의 자람이 아니라 늘 세상을 돌아보며 세상에 대해 아쉬워 하는 자신을 보면서 심판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깊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크다는 것을 알아갈수록 세상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은혜와 사랑으로 누리는 복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신앙의 자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의 아내가 왜 소돔을 돌아봤을까요? 롯의 아내가 자기 심정을 밝히지 않았으니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소돔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돔은 롯의 아내가 살아왔던 거처가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까지 흘러와서 이방 땅에서 자신의 터전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그 점을 생각하면 롯의 아내에게 소돔은 자신의 수고와 땀과 노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소돔이 심판을 받고 무너진다면 그동안 자신의 모든 수고와 노력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기에 아쉬운 마음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잘못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있게 했다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천사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 것은 소돔에는 너희의 수고와 공로가 전혀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으로 인도하셨고 소돔에서의 모든 것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이기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무너뜨린다고 해서 아쉬워 할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한다면 결국 뒤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세상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여기는 것이 되기에 심판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 되고 롯과 두 딸이 구출된 것은 사람의 됨됨이 달라서가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됨됨이를 놓고 본다면 누구도 심판에서 구출될 자격이 없습니다. 구출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분명한 원칙은 하나님이 은혜를 입히시고 은혜를 입은 그들만 심판에서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한시라도 놓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이 생각이 우리의 심령에 믿음의 기둥으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은혜로 마음이 모아지지 않으면 결국 자신의 의와 수고와 열심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것으로 자랑하고 비교하고 경쟁하는 사탄의 틀 속에서 롯의 아내가 소돔을 돌아보듯 나를 돌아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19절에서 롯은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롯이 주께 은혜를 입고 주께서 인자를 베풀어 내 생명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왜 재앙을 만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은혜와 인자하심을 자기중심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은혜와 인자를 베푼 것으로 보지 않고 자신을 살리기 위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재앙을 만날 것을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히시고 인자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될 때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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