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5.23 20:35

(52강)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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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0:1-7http://onlycross.net/videos/gen/gen-20010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설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사실적으로 폭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 비해 뭔가 더 나은 면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설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 오히려 ‘과연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나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롯과 두 딸의 이야기도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구원 후의 이야기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내용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은 인간을 위인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인화하여 모범적 인물로 내세우고 그를 본받게 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특별하게 보이는 인물을 내세워 그를 본 받자라고 말한다면 말씀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신앙 좋은 인물을 내세워 우리를 그를 본받은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제아무리 특별하게 보이는 신앙인이라 해도 그 역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인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입니다.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고치시고 세워 가시는지가 성경에서 우리가 마음을 집중해서 바라봐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그러한 시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음을 분명히 자각해야 하고 오늘 우리의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라는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 아브라함은 그랄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랄에서도 애굽에서와 같이 사라로 인해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는지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고 믿은 아비멜렉은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랄에서의 사라 나이는 90세입니다. 사라가 아무리 예쁘다 해도 90세 할머니가 젊은 여자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무엇이 두려워서 사라를 누이라고 한 것인지, 아비멜렉은 90세 할머니 사라를 무엇 때문에 데려간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득이 안됩니다.

 

 

4절에서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아내로 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그랄을 다스리는 왕이 주변에 젊은 여인이 많았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할머니인 사라를 데려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었겠지요.

 

 

중요한 것은 애굽과 비슷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애굽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사라가 바로의 아내가 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바로에게 나타나 경고하심으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랄에서도 역시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가자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어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기 전이었기에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는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라고 항변합니다.

 

 

아비멜렉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항변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사라를 누이라고 알고 아내로 취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죄가 있다면 사라를 누이라고 한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아시고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과 소와 종들과 함께 사라를 돌려보냅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누구도 아비멜렉이 잘못했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인 제공자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을 찾아가십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상식과 기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납득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가 처리하는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대할 때 먼저 잘잘못을 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더 잘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재판을 하는 것도 잘못한 사람과 잘못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여 가려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상식에 비춰보면 원인제공자요 잘못을 범한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시고 벌주시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은 ‘누가 잘못했는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죄를 물으시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하지 않게 막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7절을 보면 사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됩니다. 아비멜렉과 그에 속한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와 함께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죄를 지었는지를 살피시고 찾아오셔서 벌하시고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를 방치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를 막는다고 해서 인간이 죄와 멀어진 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죄를 범하지 않게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방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아비멜렉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밖에 달리 설명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비멜렉에게서는 어떤 잘못됨도 없는 것입니까? 표면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4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사라를 아브라함의 누이로 알고 데려오긴 했지만 아직 동침하지 않았으니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비멜렉은 사건의 원인이 아브라함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따지는 것은 죄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가려달라는 식입니다. 9절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라고 따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비멜렉의 입장이었다 해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원망이 충분히 이해되고 아브라함의 잘못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하나님을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우리가 바로 아비멜렉과 같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져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또한 잘못이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잘못이 있다고 생각되고 원인제공자라 생각되는 사람에게로 원망이 향하게 됩니다. ‘너 때문이다’라는 원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인에게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린 늘 아비멜렉과 같은 습성으로 살아갑니다. 감사할 것은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누가 잘못했는가와 상관없이 내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누구도‘난 정당합니다’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또한 정당하고 의롭고 지혜가 많고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나약한 사람도 붙드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심지어 이방인을 세워서까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보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결과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될 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그런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기억하시고 자신의 정당함에서 불의를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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