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5.30 16:38

(53강) 하나님과 아비멜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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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0:8-18http://onlycross.net/videos/gen/gen-2008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설교>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실수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애굽과 그랄에서 사라를 누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무산하게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사라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면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사라가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이미 하갈이란 여종의 몸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잇는 아들이 아니라 약속을 잇는 아들을 주고자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사라의 몸을 통해 낳아야 했던 것이고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 애굽에서처럼 사라를 누이라고 한 일에 개입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서 사라가 남편이 있는 여자임을 말씀하고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라며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라며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으로서는 아브라함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만약 사라를 아내로 취했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죽었을 것을 생각하면 사라를 누이라고 한 아브라함에게 원망의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는 말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한 이유를 말합니다. 사라로 인해 자신이 죽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라가 정말로 자신의 이복누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들은 아비멜렉은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사라도 돌려주고 거처할 땅까지 내어줍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출산하게 하신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아브라함은 그랄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로 인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랄 사람들은 왕 아비멜렉은 물론이고 종들까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서 말씀하셨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라를 돌려보내고 재물까지 준 것은 아비멜렉이 비록 이방 사람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이방인과는 달랐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아비멜렉이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자 그들이 심히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쓸데없는 걱정에 붙들려 있었던 것이 됩니다.

 

 

사실 아비멜렉이 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것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고 신기한 꿈도 꿀 수 있는 것인데 단지 꿈에서 들은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그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어떻게 꿈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아비멜렉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이라는 말 밖에 달리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면 우리가 볼 때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완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씀에 굴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라로 인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생각하여 스스로 대비책을 세워 사라를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각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누구로 인한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의지와 실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개입이고 다스림의 결과입니까? 사람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믿음이 사람의 의지로도 가능한 것이라면 성령이 오실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의지로 하나님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갖도록 촉구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저의 믿음도 여러분의 믿음도 성령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시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잘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랄의 사건에서는 아비멜렉보다 못난 모습만 보여줍니다. 사라로 인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상황을 예상했다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마땅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에게서 그 어떤 믿음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는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계속되는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실력이나 자질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실수와 잘못이 있는 인간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높이고 영광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증거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고, 오늘 우리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보게 하십니다.

 

 

7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아브라함은 도무지 선지자답지 못합니다. 선지자로 인정할 만한 믿음의 모습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선입견이고 착각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자질도 의지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늘 사람을 구분하고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라면 믿음이 좋아야 해’라는 생각으로 구분하면서 그런 생각으로 누군가를 대하기 때문에 ‘집사가 왜 믿음이 없어’‘장로가 왜 그렇게 밖에 못해’라는 생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을 위해 일할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으로 열심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음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 도구고 봉사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브라함을 보면서 ‘믿음의 문제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구나’라는 깨달음이 있게 되는 이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능력이 있어서일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약속에 의해서 수많은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끌어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기도는 약속에 있는 자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닫힌 태를 열어 출산하게 하는 생명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약속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와집니다. 즉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인해 우리가 생명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책임지고 계신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두려움이 없는 신자로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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