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6.20 18:58

(56강) 브엘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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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1:22-34http://onlycross.net/videos/gen/gen-21223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2.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설교>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껄끄러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일로 인해 하나님이 아비멜렉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고 사라를 돌려보내면서 영과 소와 종들을 주었고 여러 사람 앞에서 사라를 수치를 가리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은 천 개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아브라함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만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분명 껄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 아비멜렉은 생각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하면서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23절)는 말을 합니다.

 

 

아비멜렉의 말을 보면 어떻게든 아브라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아브라함으로 인해 아비멜렉은 많은 손해를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남의 땅에 들어온 나그네고 아비멜렉은 왕의 위치에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아브라함이 잘못했고 아브라함이 약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손을 내밀어 좋은 관계를 갖고자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쉬운 사람은 아브라함이지 아비멜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인 관계를 뒤집고 오히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과 자기 아들과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할 것을 요구하고 아비멜렉 자신이 아브라함을 후대한 것처럼 아브라함도 자신을 후대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무엇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함께 계신다는 말에서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막으시고 자기 집의 태를 닫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심을 알았고 아브라함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의 관계가 어긋난다면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아브라함과 좋은 관계에 있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두렵고 대단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비멜렉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의 힘으로 얼마든지 아브라함을 그랄에서 추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후대를 받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비멜렉의 입장이라면 아브라함을 혼을 내서 쫓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들 아비멜렉이 비난 받을 일은 없습니다.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지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입장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누군가에 대해서는 화를 내기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듯 교회로 함께 하는 모든 지체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대하는 모습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바라보는 신자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요구대로 맹세하면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해 아비멜렉을 책망합니다. 아비멜렉은 누가 그리하였는지 자신을 알지 못하고 알려주지도 않았고 들은 적도 없다고 하면서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웁니다. 또한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아 아비멜렉에게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고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브엘세바로 이름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주고 아비멜렉에 받은 입장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을 세우면서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또한 일곱 암양 새끼를 아비멜렉에게 주면서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아비멜렉은 언약을 혜택을 누리는 입장에 있게 된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빼앗은 것은 아브라함을 핍박한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판 우물이니 내 놓으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비멜렉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지만 어쨌든 그 일은 아브라함과 관계를 어긋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언약을 세워 그 모든 일을 덮은 것입니다.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준 것이 그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잘못한 것이 있음에도 언약으로 인해서 아브라함과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너를 후대할 것이니 너도 나를 후대하라고 맹세까지 하게 하면서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아브라함을 후대해주면 자신도 하나님께 후대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잘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혜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후대한 것과 상관없이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으로 인해 은혜를 받는 관계에 있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은혜를 받아 누리는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복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맹세하고 맹세를 지키고 실천함으로 그에 다른 대가를 받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시는 언약의 세계가 신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언약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의지와 실천이 아니라 언약을 세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약에 의해서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고 한 것은 우물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후대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그럼에도 아비멜렉을 후대하겠다는 맹세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우물이 아비멜렉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잘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되고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후대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은 인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언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혜택을 누리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인한 용서입니다. 언약 밖에 있다면 우리가 행한 대로 벌써 보응을 받았어야 하지만 예수님이 대신 모든 보응을 받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혜택을 누리는 것이 언약 안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신자는 자신의 행함이나 열심을 근거로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행하심과 열심이 우리를 이미 영원한 복의 세계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곧 구원의 보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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