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8.01 17:50

(62강) 위로 받은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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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4:61-67http://onlycross.net/videos/gen/gen-24616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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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1.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63.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설교>

 

본문은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특별한 내용은 없어 보이는데 한 가지 납득이 쉽게 안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67절에 보면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사랑하였다고 하고 어머니 장례 후에 위로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 한 것이 사라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던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친의 죽음과 결혼은 다른 문제입니다. 때문에 모친의 죽음으로 상심해 있던 마음이 리브가와의 결혼으로 위로를 얻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라가 자신의 결혼을 보지 못하고 죽었음을 생각한다면 더 상심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이삭의 위로는 결혼이라는 기쁨 때문에 상심의 마음이 조금 덜해지는 수준의 위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만으로는 이삭의 위로가 어떤 의미의 것인지 알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아내로 삼고 사랑한 것으로 위로를 얻었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을 접하면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다른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이나 이삭이 리브가로 인해 위로를 얻었다고 하는 내용들이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구하고 이삭이 장가가는 이야기도 일상입니다. 그런데 그 일상의 삶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모두 나의 행복으로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아브라함의 일상은 그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들이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현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만 삶에 대한 생각과 추구하는 방식과 방향과 바라보는 모든 것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모습들이 다르게 나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당시의 사람들과 일상이 달랐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약속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을 무시하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살았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람들의 일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말씀하면서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사라는 단순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개입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죽었습니다. 만약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라의 죽음은 약속의 위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를 위해 계속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 리브가를 보내신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삭이 리브가에게서 그것을 생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삭의 위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리브가를 세우심으로 계속 되고 있음을 알게 됨으로 인한 위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위로를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과 이삭도 다른 세상을 삽니다. 몸은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살아가지만 그의 생각이나 추구하고 소망하는 것은 세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육신으로 사는 삶이 같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도 같지만 추구하고 소망하는 것은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분명한 사실 안에서 헛되지 않은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삶의 중심이고 원칙이었습니다. 며느리를 구하는 일에도 개인적 욕심이 아니라 약속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실 것을 믿고 종을 보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세상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종결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약속을 바라보고 약속에 자신을 맡긴다면 현재를 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딸이나 여동생을 둔 입장에서 라반과 브두엘이 이해가 됩니까? 리브가는 또 이해가 됩니까? 라반은 보지도 못한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집을 떠나는 동생에게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라는 이해 못할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이 결혼을 위해 집을 떠나는 동생에게 할 수 있는 말일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약속 안에서는 그런 말들이 서로 통용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길을 가는 것이 오늘날의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거나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고 순종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순종하게 되는 것 까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많은 아픔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실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신다면 우리는 성취된 약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약속의 성취가 담고 있는 영원한 영광과 생명은 아직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서는 마치 겨자씨처럼 작고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는 세계로만 보이기 십상입니다.

 

 

이 때문에 현재 눈에 커이고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좇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감추어진 영광과 생명을 믿음으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세상이 알 수 없는 약속을 믿는 그 길로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현실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든든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약속으로 인한 이삭의 위로는 오늘 우리에게는 약속의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로 가능한 위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부활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위로로 삼고 자식을 위로로 여기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로로 삼는 특이한 길로 가는 특이한 사람이 신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인들은 신자라는 특이성을 모두 상실한 자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영광과 생명에 소망을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재적인 것에만 소망을 두고 그것으로 위로를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특이성이 없이 세상과 동일한 생각으로 동일한 길을 가는 하나의 인간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현재적인 것들은 흘러가면서 사라질 것들이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비록 현재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광에 참여할 자로 우리를 부르셨고 참여한 자가 되도록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하겠습니까? 약속은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죄를 알게 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삶에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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