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9.05 19:49

(66강) 그 아버지에 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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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6:1-11http://onlycross.net/videos/gen/gen-26011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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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설교>

본문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거하던 땅이고 이삭이 거하던 땅에 그런데 그 땅에 또 다시 흉년이 든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시작부터가 인간의 환상과 착각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있는 곳에는 그 어떤 환난이나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그 모든 나쁜 것을 물리쳐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흉년이 들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것만 생각해 봐도 인간이 아는 신앙의 세계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땅에 흉년이 들자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게 됩니다. 20장에 보면 아브라함도 그랄로 가서 아비멜렉을 만나는데 아브라함이 만난 아비멜렉과 이삭이 만난 아비멜렉은 동일인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아비멜렉은 애굽이 왕을 바로로 칭한 것처럼 그랄이 칭하는 왕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와는 약 70년의 간격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동일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동일인이라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누이라는 거짓말에 속고, 그 아들 이삭에게도 리브가가 누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결과가 되는데 본문에서 아비멜렉이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동일인은 아닐 것입니다.

 

 

이삭이 흉년으로 인해 그랄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7절에 보면 그랄 사람들이 이삭에게 아내 리브가에 대해 묻습니다. 아마 리브가가 예쁘니까 관심을 가지고 ‘그가 누구냐?’라고 물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 역시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리브가가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랄 백성들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신을 죽일까 염려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오로지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잘못을 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경험담을 말하면서 ‘너도 나중에 리브가로 인해 위기에 처하면 나처럼 해라’고 가르쳤겠습니까? 오히려 아브라함이 그 일에 대해 가르쳤다면 ‘아내로 인해 위기에 처해진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고 아내라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이삭에게서 아브라함과 같은 방식의 모습이 나온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와지게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 해도 자신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는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머리로 알고 믿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고,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분이며, 전능하신 분이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라는 등등의 많은 지식들이 머리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만약 신자가 알고 있는 내용들이 실제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날 수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믿고 바라는 절대적인 믿음의 모습만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아는 바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머리에 담긴 지식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악한 본성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5절에 보면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들었으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명령과 계명과 규례를 다 지켰다’고 자랑했을까요? 아브라함은 ‘내가 언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까?’라며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믿음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롯에게 거할 땅을 먼저 선택하라는 등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었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반응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아들이 없자 하갈과 동침하여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아들을 얻는 등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또한 그랄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라를 누이로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그 또한 아브라함이 약속을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뿐이고, 아브라함을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임을 생각한다면 아브라함의 순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고 율법, 계명, 율례, 법도를 지켰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시대에는 특별히 율법, 규례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할례 외에는 율법으로 주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모두를 지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장차 모세에게 주어질 율법과 계명 또한 지켰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는 법 조항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말씀을 지키는 것을 성경의 어떤 항목과 조항을 지켜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방법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명령, 계명, 율례, 법도를 지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 즉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가 지향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힘과 노력을 내려놓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심을 믿게 하는 것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너 때문에 내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 했고 그렇게 되었다면 너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을 뻔했다며 이삭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 이삭이나 리브가를 범하는 자는 죽인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비멜렉은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며 백성들을 법으로 잘 다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이 아비멜렉처럼 법으로 아브라함이나 이삭을 다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두말 할 것 없이 죄에 대해 심판을 받고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용서로 대하십니다. 이것이 약속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약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자손으로 천하 만민이 복을 얻는다는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서 복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 실력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약속에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복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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