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9.19 20:03

(68강) 복에 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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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7:1-14http://onlycross.net/videos/gen/gen-2701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11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14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설교>

 

복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리고 복이 주어짐에 있어서 인간의 정성과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수단과 방법도 복을 자신에게로 끌어오는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실 자에게 주시는데 사람들은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복을 중심에 두고 복을 차지하기 위해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을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라고 시작합니다. 이삭이 늙어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이삭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에서를 불러 들에 가서 사냥을 하여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에서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하나님의 복을 계승 받을 자로 생각합니다. 맏아들이 복을 계승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에서는 이삭이 좋아했던 아들이기에 그 생각은 더욱 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에서를 불러서 그 자리에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하여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먹고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이삭은 무엇 때문에 그러한 말을 했을까요? 아마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자신을 기쁘게 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계승 받을 또 하나의 조건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을 기쁘게 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이것이 복에 대한 이삭의 오해입니다.

 

 

이삭이 축복을 하겠다고 하지만 축복의 대상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복의 계승자를 자신이 선택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말을 리브가가 엿듣게 됩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축복이 야곱에게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리브가는 에서보다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으로 하여금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눈이 어두운 이삭을 속일 계획을 세웁니다. 야곱에게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으로 이삭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이삭에게 가져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가 가져온 것처럼 하여 먹게 하고 축복을 받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리브가의 계획에 야곱은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고 자신은 매끈매끈하여 이삭이 자신을 만지면 에서가 아닌 것이 발각될 것이고 자신을 아버지를 속이는 자로 여겨져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따르라고 합니다.

 

 

리브가와 이삭의 대화를 보면 이들은 어떻게든 이삭에게 축복을 받으면 그것이 복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삭에게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도 이삭이 축복한 자를 축복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리브가와 야곱 역시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손과 목의 매끈한 곳에 입어서 에서처럼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꾸미고 리브가가 만든 별미를 가지고 가서 이삭에게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 내용에서 어쨌든 억울한 사람은 에서입니다. 에서는 이삭의 말대로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이삭의 말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야곱이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받습니다. 누가 봐도 야비한 사람은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받은 축복이 취소대고 대신 저주를 받아야 하고 축복은 에서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축복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게 축복을 뺏긴 에서는 이삭에게서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39, 40절)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

 

 

이처럼 성경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가 의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도 복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야곱처럼 남을 속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복을 받고 잘 살기를 바라는 모든 것이 복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왜 야곱에게 한 축복을 취소하지 않았을까요? 야곱에게 속아서 축복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축복을 취소하고 야곱이 우려했던 것처럼 저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을 나무라지 않은 것은 비록 속임수에 의해 야곱을 축복하였다 해도 하나님의 뜻에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로 향해 있음을 생각했기 때문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불의한 것일까요? 우리의 생각에는 야곱이 에서보다 인간성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아닌 에서가 축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과연 야곱과 에서가 다른 인간일까요? 에서 역시 야곱과 다를 바 없이 복에 집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누구에게로 향해 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야곱과 같은 복을 자신도 받아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에서가 저주 아래 있게 된다 해도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의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인간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야곱에게 복을 주기로 작정하셨고 결국 야곱이 복을 받았기 때문에 야곱의 속임수가 마치 하나님에 의한 일인 것처럼 보여지기 쉽지만 야곱의 속임수는 복에 집착한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야곱은 무엇이 복인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여느 사람과 똑같이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늘의 참된 복에 눈을 뜨게 하시고 세상의 형편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하심으로 이미 복 있는 자로 존재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도 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복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기 위해 뭔가를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본문에 별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서는 별미를 만들어 바쳐야 한다고도 하고 ‘신년별미축복성회’라는 것을 하는 교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스스로 교회 아님을 증거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복에 대해서 인간의 뜻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인간의 뜻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복을 받기 위해 힘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복이 무엇인가를 알고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이미 주어진 복의 세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벧전 3:14절을 보면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의 길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육체, 성공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은혜의 길로 가게 되며 진리를 말하고 진리로 기뻐하며 고난에서도 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이 복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복을 내려놓게 하시고 하나님이 펼치시는 복의 세계를 배우고 알아가는 것이 뜻을 두게 하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복 있는 자임을 알고 자신이 그러한 복 있는 자로 세워지기를 소망한다면 그것만으로 그는 복의 길을 가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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