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2.07 09:59

(30강)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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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1:1-9http://onlycross.net/videos/gen/gen-1101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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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설교>

 

바벨탑 사건에서 대개 초점을 두는 것은 인간이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아 인간의 이름을 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교만으로 여기고 교만을 심판하기 위해 바벨탑 쌓는 것을 막으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과학의 발달과 함께 우주까지 정복하고자 하는 현대 사회를 두고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과 말을 아예 틀린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기 때입니다. 하지만 바벨탑을 그런 방향으로만 보게 되면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놓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우주를 정복하는 것 자체를 바벨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이 우주 전부를 알고 말 그대로 정복하게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우주를 알아가고 별에 발을 딛는 것을 하나님이 금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대 교회가 큰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을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빗대어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예배당을 크게 건축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만약 바벨탑을 그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교회는 자신들은 바벨탑과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이유가 우리 이름을 내는 것과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두 가지 이유로 바벨탑을 쌓고자 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바벨탑이 무엇이기에 어떻게 해서 바벨탑이 인간의 이름을 내는 것이 되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길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홍수 심판 후의 사람들입니다. 홍수 후의 세계는 노아의 세 아들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홍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죄가 가득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악해서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죄를 보게 될 때마다 무엇을 염려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또 다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다는 염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있을 수 있는 홍수 심판을 대비해서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고 그 장소로 바벨탑을 만들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인간이 그처럼 높은 탑을 쌓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높은 탑을 쌓아서 인간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겠습니까?

 

 

말한 대로 그들은 홍수 심판에 대해 들으면서 홍수로 인해 높은 산도 잠겼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어떤 홍수에도 잠기기 않을 탑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힘으로 높은 탑을 쌓아 또 다시 홍수 심판이 반복된다고 해도 흩어짐을 면하고 그것으로 인간의 힘을 드러내어 이름을 내자는 것이 바벨탑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벨탑을 쌓은 것으로 드러난 잘못은 무엇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높은 탑을 쌓은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탑을 쌓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필요로 하는 그들의 생각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인간에게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고 무지개는 홍수를 피하기 위한 바벨탑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는 세상이 죄로 가득해지고 인간의 생각이 악하다고 해도 그 죄를 보시고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바벨탑을 쌓은 것은 무엇을 믿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을 믿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바벨탑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라고 말하고, 8절을 보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탑만 쌓은 것이 아니라 큰 성읍, 도시를 함께 건설하였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이룬 세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세운 것을 지키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이 세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간을 흩으셨지만 인간이 흩어졌다고 해서 바벨을 쌓았던 속성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흩어진 가운데서도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것이고 그러한 생각에 의해 종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적인 존재를 만들고 신의 도움으로 자신을 재난과 불행으로부터 지키고 보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독교 신앙이 이러한 바벨의 속성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을 보면서 자기 신앙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잘못한 것이 보일 때도 역시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이 아닌지의 문제로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사고라도 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신앙의 부요에서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무지개 언약 안에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악함을 보시고 홍수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홍수 심판은 인간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지개는 다시는 인간의 악함을 보고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따라서 홍수 후의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의 힘으로 보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의 악함을 보면서 그것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셨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바벨탑을 쌓은 속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악함으로 인한 심판이 없다면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은 뭡니까? 이것은 홍수로 심판하실 때와 마지막 날의 심판의 이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홍수로 심판하신 것은 인간의 악함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악하기 때문에 심판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의 심판은 그러한 악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영광돌리지도 않는 것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불의함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온전하다고 해서 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행위가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고 있으면 죄 없다는 영지주의식 생각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은 ‘내가 죄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불의로 가득한 나 같은 자를 부르셔서 예수 안에 있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고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서 자연히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존하고 지키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종종 비난 받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당신이 그러고도 예수 믿는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입니다. 사실 신자가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사람을 의식하며 행동을 바르게 하고자 힘쓰는 것은 신앙의 바른 방향이 아닙니다.

 

 

그런 비난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내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로 비난 받는 것을 정당화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비난 받지 않는 도덕적인 인간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니고 신자의 본질도 아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내가 쌓아야 할 바벨탑이 없습니다. 어떤 바벨탑을 쌓는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지켜주거나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고 안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무능을 아는 것으로 시작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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