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2.28 10:14

(32강) 너는 복이 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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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2:1-9http://onlycross.net/videos/gen/gen-1201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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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설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시고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칠십오 세였습니다. 젊지 않은 노년의 나이에 칠십오 년 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떠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으로 이해합니다.

 

 

  히 11:8절에서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함으로 아브람이 하란 땅을 떠난 것을 믿음으로 증거합니다. 이런 내용을 근거해서 아브람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자고 독려하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본받자’는 말처럼 공허한 말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도 많이 실감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믿음을 본받든 말씀에 순종하든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불가능한 것을 마치 의지를 가지고 결단만 하면 될 것처럼 선동합니다.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을 때는 뭔가 될 것 같은 희망을 갖게 되고 힘이 생기다가도 실제의 삶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인해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땅의 모든 족속은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습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아브람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이 무엇이고 저주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브람을 세우셔서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합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고 하시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라거나 힘써서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의미입니다. 언약에 대해 아브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대로 된다’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되어짐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때문에 믿음에는 우리의 행함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인간의 행함에 의해 결정되거나 변동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은 아브람의 행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에게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아에게 적용시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노아를 축복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당시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아를 축복한다면 그것은 노아가 방주 만드는 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보지 않고 노아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믿으며 말씀대로 될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고향집을 떠난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오히려 아버지까지 버리고 떠난 것에 대해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아버지까지 버리고 고향을 떠나는가?’라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든 아브람에게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그것이 곧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세상이 생각하는 인간의 행함은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아브람이 세상을 복되게 하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도구로써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람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도무지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음 받을 수 없는 아브람을 세워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람을 보면서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것도 아브람 개인의 이름이 높임 받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이름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담으시고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의 이름을 높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높이는 것이고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복이 되고 모든 족속이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면 복을 얻기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가 거부됩니다. 헌금 하면 복 받는다든지, 교회에 봉사하면 복 받는다는 말들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과 맞지 않습니다. 언약을 무시한 채 인간이 고안해 낸 기독교라는 이름을 걸친 종교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자의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의 깨달음과 의지의 결과가 아님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선택과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의지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과 협조하여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이끄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항하는 패역한 족속의 모습뿐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말씀에 의해 설득 당하고 하나님의 일하심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말씀에 의해서 인간에게서는 의로움이 나올 수 없음을 설득 받고 그동안 의로운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다만 하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의 행하심만을 의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람에게 일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과 큰 민족과 복은 세상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복이 되시는 분 역시 그리스도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인간의 행함을 거부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게 되고 깨닫습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하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복으로 고백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이미 복 안에 거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복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게 복이 되신다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말씀으로 설득하고 굴복하게 함으로 그리스도가 복이 되신다는 믿음의 자리로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원인이 있어서 복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저주와 심판의 원인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받을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면서 은혜와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우리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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