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3.08 09:55

(41강) 하갈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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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6:7-16http://onlycross.net/videos/gen/gen-16071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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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설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후손을 하늘의 뭇 별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람이 할 일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는 것 외에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힘든 것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다리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몸이 늙어서 출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사래가 하갈에게서 자녀를 낳을 것을 권유하자 그 말대로 하갈과 동침하여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자신의 잉태를 빌미삼아 사래를 멸시하게 되고 사래가 그런 하갈을 학대하자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합니다.

 

 

그런데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친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묻자 하갈은 사래를 피하여 도망을 치고 있는 자기 처지를 호소합니다. 이처럼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을 치고 있는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는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면서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갈에게 하신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는데 왜 또 다시 하갈에게 동일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 약속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사래로 인한 후손과 하갈로 인한 후손이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갈로 인한 후손은 아브람이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을 동원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고, 사래로 인한 후손은 아브람과 사래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각기 다른 의미가 있는 두 후손을 함께 공존하게 하심으로 참된 신앙의 세계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신앙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가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갈의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은 축복의 의미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하갈에게 하신 약속은 축복으로 보입니다. 하갈의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겠다는 것은 물론이고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을 “고통을 들으셨음”이라는 뜻의 ‘이스마엘’로 정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갈을 돕고 계신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하갈도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시고 돕고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도우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여겼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하갈의 편에 계신 것처럼 생각되기 쉽습니다. 하갈에게 사래에게로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셨으면서도 하갈의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사래에게는 약이 오를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하갈 편도 사래 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은 이 일의 도구로 부름 받았습니다. 어떤 도구로 어떻게 사용되는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지 인간의 뜻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판단을 내려 놓고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로 하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하갈의 고통은 사래의 학대였습니다. 그런데 왜 사래에게로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할까요? 사래에게 돌아간다면 사래의 학대는 계속될 것입니다. 도망을 쳤다가 돌아왔으니 전보다 더 심한 학대를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면 사래에게 돌아가라는 것보다 사래를 피하여 다른 곳에서 편히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럼에도 사래에게 돌아가게 하시고 그 수하에 복종하게 하는 것을 고통을 들으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안됩니다.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것은 하갈이 사래를 피해 편히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래에게 돌아가게 하신 것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점을 하갈이 아닌 사래에게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갈이 사래에게 돌아간다면 사래에게는 자신의 잘못됨이 드러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갈이 아이를 잉태한 것부터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사래의 인간적 생각의 결과입니다. 하갈을 학대한 것 또한 자신의 잘못됨을 생각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하갈을 사래에게 돌아가게 하셔서 사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불신앙의 자기 모습을 보게 할 도구가 되게 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함께 함으로써 인간적 방법을 동원한 사래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 된다는 것을 보이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일에 인간의 방법이 오히려 걸림돌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살피심입니다.

 

 

하지만 하갈은 하나님을 자신이 처한 형편을 살피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자신의 씨를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것도 자신을 도와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갈의 씨를 번성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갈의 씨가 번성하고 아브람의 씨가 번성함으로 인해서 세상은 약속의 후손과 약속 밖에 있는 후손으로 나뉘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후손으로 인해서 약속의 자손과 약속 밖에 있는 자손의 다른 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하여 누가 천국 백성인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피시고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 언약 밖에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번창하고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 현실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번성하는 복을 누리고 믿지 않는 자는 쇠퇴하게 하셔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종교성과 신에 대한 상식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갈을 사래에게 돌아가게 하심으로 하갈과 사래 모두가 문제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갈처럼 내가 처한 처지와 형편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고, 나의 처지와 형편을 하나님이 살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피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나의 길을 찾아 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갈에게 물으신 것처럼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브람도 사래도 하갈도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기에 천국은 인간의 자질로는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살피신다면 육신의 형편과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육신에 붙들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는 그 처지를 살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돕고 해결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 됨이 드러나게 하셔서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는 나를 백성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전능하심에 눈이 열리게 하시는 것으로 일하심이 당연합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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