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3.22 09:24

(43강) 할례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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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7:9-14http://onlycross.net/videos/gen/gen-17091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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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설교>

 

하나님께서 할례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 세우십니다. 14절에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할 정도로 할례 언약은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할례가 단지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할례의 의미를 모르고 할례를 행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때문에 유대인의 할례는 무의미합니다. 그들은 할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몸에 할례를 행한 것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할례를 언약으로 세우신 것은 몸에 하는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 10: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렘 9:26절에서는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롬 2:28,29절을 보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에 행한 할례가 진짜 할례고 마음에 할례를 행한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인 것입니다.

 

 

할례는 포피를 베는 것이고 포피를 베는 것은 남자 생식기의 끝을 자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끝만 자르는 것이 아니라 생식기 전부를 자르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생식기 전부를 자를 수 없기 때문에 끝만 자르게 하여 언약의 표징을 몸에 남겨 두게 하여 표징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어떤 언약에 의해 살아가는가를 잊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 버린다면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육신의 자손이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말합니다.

 

 

후손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육신의 후손은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육신의 후손이 아니라 다른 후손이 있을 것을 가르칩니다. 다른 후손이 곧 약속의 후손입니다.

 

 

물론 약속의 후손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통해 태어납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자손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할례는 자신이 육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집에서 난 사람만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사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샀다면 그도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일지라도 할례를 받으라는 것은 할례는 아브라함 혈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처럼 할례는 아브라함이라는 육신의 혈통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행한 그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조건과 힘으로는 존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 사실이 믿음으로 그 속에 자리한 사람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신자를 항상 자기부인으로 이끌어 갑니다. 자기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자신이 부인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조차도 육신의 힘과 조건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것을 골 2: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말합니다.

 

 

육의 몸을 벗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부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의 몸을 벗지 못함으로 ‘믿으면 된다’‘기도하면 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되어 진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진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 모두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는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한 최초의 사람이 이삭입니다. 할례를 팔일 만에 행하는 것은 창조와 연결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육일 동안 창조하시고 칠일 째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상태의 세상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칠일 다음에 팔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안식의 상태가 계속되고 세상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깨어진 것이고 결국 팔일의 안식이 깨어진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보다 스스로 자기를 위한 안식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이 안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한 세상을 살고자 하는 것이 세상이며 할례 받지 못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는 언약의 표징을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 일의 의미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든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되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믿고 기뻐하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시겠다는 뜻을 드러내신 것이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로운 세상의 백성이 할례, 즉 마음의 할례를 행한 자들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는 인간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창 15:7절에 보면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준비하여 반으로 쪼개 놓게 하고 해가 져서 어두울 때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심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이루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람과 같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시는 것은 아브람과 상관없이 하나님 홀로 언약을 이루실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아브람이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불안도, 의심도 없이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으며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 안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조건을 봄으로 언약을 믿지 못했고 그 결과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어떻게든 아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할례 언약을 세우신 것은 이스마엘을 생산한 아브람의 생각이나 방법, 노력은 결코 용납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이스마엘을 생산한 아브람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할례 언약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행위가 있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심으로 생명의 길로 가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 곧 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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