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4.05 08:28

(45강) 사라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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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8:1-15http://onlycross.net/videos/gen/gen-18011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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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없습니다.

 

<본문>

 

1.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설교>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사람 셋을 만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본문이 유일하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보고 달려가 몸을 땅에 굽혀 영접합니다. 그리고 물을 가져다가 발을 씻게 하고 사라에게는 떡을 만들라고 하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어 요리를 하게 하여 엉긴 젖과 우유와 함께 대접을 합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최고의 대접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신분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대접을 한 것일까요?

 

 

 3절에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향해 ‘내 주여’라고 호칭한 것을 생각하면 세 사람의 신분을 알았던 것이 아닌지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라는 호칭을 남편이나 상전, 그리고 누군가를 자신보다 높여 부를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주’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만으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하나님과 천사로 알아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히 13:2절에서는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자가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을 만난 사람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나그네로 만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나그네를 ‘주’라 호칭하며 최고의 환대를 한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신앙적 행위이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복 받을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환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고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실 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인 기간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년 이맘때”라고 구체적인 기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라는 웃음으로 반응합니다. 자신은 노쇠하였고 아브라함도 늙어서 아이를 낳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라의 웃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웃음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3,14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환대가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환대로 기뻐하셨다면 그에 대한 반응이 있었을 것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웃음으로 반응한 사라를 책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백성이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환대한 것처럼 구제하고, 봉사하면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 주신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오해라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한들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17:1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는 능하지 못한 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조건도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사라가 아브라함과 자신의 노쇠함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회의를 드러낸 것은 하나님의 전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자신의 조건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루지 못하실 일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 형통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고 생각하는 형통이 아니어서 형통을 형통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을까요?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하신 일은 내년 이맘 때 아들이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과 말씀에 대해 웃는 사라에 대해 책망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두 천사가 소돔으로 가서 롯을 구하고 소돔은 멸망시키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인해서 드러난 것은 나그네를 환대한 아브라함의 성품과 약속을 믿지 못한 증거인 사라의 웃음입니다. 그리고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고 소돔의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나그네를 환대했다고는 하나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롯의 가족이 소돔의 멸망에서 구원 받았지만 그 또한 롯이 나그네를 대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롯이 나그네를 대접한 연유로 소돔에서 구출된 것이라면 설사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봤다고 해도 소금기둥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원칙은 하나님의 긍휼, 즉 불쌍히 여겨주심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에 이를 아무런 의가 없고 완벽한 율법 실천 또한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의 방식이 아니면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사라가 자신의 노쇠함으로 인해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한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보며 ‘이런 내가 천국 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가 자신을 바라본다면 인간의 본질, 즉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런 내가 천국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런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의의 나라인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감동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은 절대로 인간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라’‘믿음에는 불가능이 없다’라는 말로 인간에게 초점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쇠함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웃음으로 반응한 사라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웃음으로 반응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증거하는 것은 하늘의 영광이고 영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바라보며 소원하는 것은 세상일입니다.

 

 

하나님은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부자 되고 싶어 발버둥을 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세상을 구하고 나의 의를 구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웃음으로 반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창 21:5,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고 말합니다. 사라는 약속대로 태어난 아들로 인해 웃게 됩니다. 본문의 웃음과는 다릅니다. 될 수 없는 일을 되게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웃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말씀을 비웃기만 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을 보게 하셔서 웃음이 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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