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5.04.19 08:20

(47강) 아브라함의 항변

조회 수 280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창 18:22-33http://onlycross.net/videos/gen/gen-18223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2.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설교>

신자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시는가?’에 관심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간섭하시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현실을 바르게 볼 수 있게 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종교입니다.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 종교의 관심인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간섭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그것이 기독교다운 것입니다. 만약 ‘내게 무엇을 주시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되면 결국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기독교는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이지 아브라함의 신앙이 좋아서 하나님께 세상의 부를 받아 누렸다는 것은 없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 둘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지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꿈속에서라도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시면 그냥 모습만 보여주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계시를 주실 것이라는 계산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지만 특별히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뿐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으로 인해 사래가 웃었고 드러난 것은 말씀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래의 연약함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천사 둘을 소돔으로 바로 보내면 되는데 왜 아브라함을 거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을 거쳐 가심으로 약속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분명히 세우고자 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돔에서 롯이 구원 받는 것은 롯이라는 인간의 공로와 의가 개입된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의 결과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도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소돔에는 롯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돔의 죄악을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실 뜻을 아브라함에게 드러내십니다. 두 천사가 소돔으로 간 것을 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항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항변은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5절)는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시는가?’에 초점을 두었을 때 나올 수 있는 항변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은 악인과 함께 죽을 수 없으며 악인과 동일한 대접을 받는 것도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인은 의인다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맞습니다. 의인을 악인과 동일한 자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것은 의인이 과연 존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항변은 의인이 없는 세상 현실을 알지 못한 무지한 자의 무의미한 항변으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의인은 없다는 사실이 이어지는 하나님과의 대회에서 드러납니다. ‘의인 오십을 찾으면’로 시작하여 십 명으로까지 내려갔지만 결국 아브라함은 의인을 찾지 못한 채 하나님과의 대화가 끝난 것입니다.

 

 

본문을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말하기도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롯을 위한 중보기도라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며 하나님의 일을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한 것으로 몰아가는 아브라함의 무지가 드러난 내용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소돔의 롯을 생각하고 의인에 대한 말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롯을 살려달라는 중보기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의인이 악인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심판은 악인의 죄에 대한 보응인데 왜 의인이 악인과 함께 죽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일을 부당한 것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부당한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나름 의인으로 칭송 받으며 선행을 행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부당하신 일일까요?

 

 

단적으로 말씀드릴 것은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현재도, 그리고 세상 끝날 때까지 본래적 의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의인을 언급하는 것은 아마 소돔에 있던 롯을 의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브라함의 말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는 일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의인 오십을 말할 때 거절하지 않으시고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인해 악인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없었습니다.

 

 

렘 5:1절을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소돔과 다르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루살렘에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사람만 있어도 용서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은 심판의 뜻이 아니라 용서의 뜻을 가지고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이 아니라 용서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벌 줄자는 벌주고 상 줄자는 상주시는 것입니다. 즉 악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은 복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악인이 건재하고 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생각한 하나님의 정의였고 우리 생각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오해입니다.

 

 

만약 악인을 벌주고 의인을 상주는 상선벌악을 제대로 시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면 지금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따라서 의인되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 하나님의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죄를 많이 행했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를 누린다고 해도 용서를 모른다면 그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비참한 삶을 산다고 해도 용서를 알면 구원 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가치는 하나님께 세상의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것이고 용서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심판하신다고 해도 항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에 눈을 뜨도록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눈을 뜨게 된 그것이 최고의 은총인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8 창세기 (48강) 소돔성의 악행 신윤식 2015.04.26 2952
» 창세기 (47강) 아브라함의 항변 신윤식 2015.04.19 2809
486 창세기 (46강) 선택의 이유 신윤식 2015.04.12 3107
485 창세기 (45강) 사라의 웃음 신윤식 2015.04.05 3050
484 창세기 (44강) 영원한 언약 신윤식 2015.03.28 2926
483 창세기 (43강) 할례언약 신윤식 2015.03.22 2915
482 창세기 (42강) 전능한 하나님 신윤식 2015.03.15 2931
481 창세기 (41강) 하갈의 하나님 신윤식 2015.03.08 3157
480 창세기 (40강) 하갈과 사래 신윤식 2015.02.22 2990
479 창세기 (39강) 언약과 증표 신윤식 2015.02.15 3055
478 창세기 (38강) 의로 여기심 신윤식 2015.02.08 3281
477 창세기 (37강) 멜기세덱 신윤식 2015.02.01 3032
476 창세기 (36강) 롯을 구한 아브람 신윤식 2015.01.25 3057
475 창세기 (35강) 눈을 들어 바라보라 신윤식 2015.01.18 3340
474 창세기 (34강) 아브람과 롯의 선택 신윤식 2015.01.11 3378
473 창세기 (33강) 아브람의 거짓말 신윤식 2015.01.04 3389
472 창세기 (32강) 너는 복이 될지라 신윤식 2014.12.28 3574
471 창세기 (31강) 셈의 족보 신윤식 2014.12.14 3517
470 창세기 (30강) 바벨탑 신윤식 2014.12.07 3251
469 창세기 (29강) 야벳, 함, 셈의 족보 신윤식 2014.11.30 3427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11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