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6.29 10:10

(9강) 남자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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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18-25http://onlycross.net/videos/gen/gen-02182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설교>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18절의 말씀처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 원칙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원칙을 세우기 위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혼이 창조원칙이라면 신자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원칙에 위배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나 독신으로 살았던 사도들까지 하나님의 원칙에 따르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을까요? 1:27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여자를 지으실 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남자 홀로 존재하는 것을 보시기에 좋지 않게 여기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여자를 아담을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과연 여자가 아담을 도와줄 일이 무엇일까요? 사실 에덴에서 생활하는 아담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아담에게 굳이 여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습니까?’‘그래도 여자가 있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외로움을 느낀다거나 이성적인 감정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인간에게 나타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자기중심이 된 인간이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데 그런 대상이 없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에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여자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담의 입장에서, 즉 인간의 입장에서 하신 일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신 일입니다. 즉 모든 피조물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결혼이라는 원칙을 세우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 아담 혼자는 안 되는 걸까요? 아담은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일컫습니다. 하와를 아담의 뼈와 살, 즉 자신의 몸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나는 나 너는 너’가 아니라 ‘너는 나다’는 시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1장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가 우리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구분된 관계가 아니라 한 몸의 관계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관계가 남자와 여자에게 담겨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의 관계로 존재할 때 그에 의해 태어나는 후손 역시 우리의 관계 안에서 태어날 것이고 한 몸의 관계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몸인데도 불구하고 한 몸의 관계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몸의 관계로 보전되는 세상을 이루시는 일에 아담 혼자 사는 것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따라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존재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의 한 몸의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진 것은 하나님의 창조 의도가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한 몸의 나라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보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부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기 전의 사람은 자신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기준으로 자기 입장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고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의식하게 되면 벌거벗은 자기 상태를 의식하게 되고 부끄러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될 한 몸의 관계는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관계일까요?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의식하는데 어떻게 한 몸의 관계가 가능할까요?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되 새로운 시각에서 의식하게 됩니다. 죄 아래에서 죽은 자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의식하면 죽은 몸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신 분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한 몸의 관계입니다.

 

 

한 몸의 관계라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물론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의식하고 이웃을 의식하면서 저울질하고 타인보다 못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것으로 부끄러워하는 세상의 방식이 통용되지 않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의 것을 기준하여 서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다만 그리스도의 피가 기준 되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부부라는 관계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 시각에서 부부는 서로 자기 행복을 위해 맺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도 자기 행복입니다. 이 기대가 깨어지면 부부 관계를 지속할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이혼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결혼은 자기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젊은 남녀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생각으로 부부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애초부터 마음이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에게로만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결혼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음을 알게 되고 점차 말씀의 입장에서 결혼의 의미를 생각함으로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됩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께 마음과 뜻을 더욱 굳게 두게 된다면 결혼으로 인해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혼이나 이혼의 문제를 역사 속의 윤리나 도덕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만 그 속 의미는 좋은 상대를 만나게 되어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에 뜻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한 몸 되게 하신 뜻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욕망으로 맺어지는 가정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역시 동일합니다. 인간의 관계로 맺어진 부부라는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두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의 연합과 우리가 한 몸이라고 말하는 부부의 관계에 만족하는가를 물으십니다. 진심으로 화목할 수 있는지, 사랑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정작 인간끼리 연합하여 살아가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인간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아닌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지금의 가정이라는 관계나 가정의 화목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교회 헌신을 앞세워 가정 일에 무관심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주를 향해 나아간다고 해서 주가 나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님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나의 탐심대로 하나님을 끌어 온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로 인해 무너진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바라볼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한 몸의 관계는 이제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로 말미암아 증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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