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7.06 09:31

(10강) 뱀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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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1-6http://onlycross.net/videos/gen/gen-03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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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설교>

 

많은 이들이 진리를 구하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욕망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자기 존재 가치에 뜻을 둔 것을 말합니다. 이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도록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욕망에 붙들리게 된 최초의 사건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가 인간에게 다가와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마귀가 제시한 유혹의 내용은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뿐더러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는 새로운 인간상에 매력을 느끼고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기보다는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주체가 된 삶이 유혹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선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된 삶의 자리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인간입니다.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먹은 후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인간은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에게서 자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가 주체가 되어 선악을 판단하고 구별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하신 일에까지 자신의 선악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런 내용에 대해 크게 관심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 또한 내가 주체가 되고자 하는 죄의 성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거나 병이 치료 된다거나 성공한다는 말을 듣는 것을 즐겨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보다 먹어도 죽지 않고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을 따르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마귀의 말이 더 희망적이고 자신을 유익하게 해주는 말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 인간에게 보장되는 것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생명나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명의 가치보다는 하나님 같이 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고 마귀의 유혹을 따라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대하여 접근한 것입니다.

 

 

하와가 마귀에게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답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불만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는 것으로 더 확대하여 말함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죽을까 하노라’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으로 선악과를 먹어도 된다는 가능성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게 된 최초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선악과를 먹어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의 이 말은 틀렸을까요 맞았을까요. 이해하는 시각에 따라 틀렸다고 할 수도 있고 맞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지만 그들 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죽는다고 하셨지만 죽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마귀의 말이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이 임했다는 것을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으로 증거하십니다. 결국 마귀의 말은 틀렸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마귀의 말이 더 달콤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하와가 바라보는 선악과는 달랐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족을 위해 그 나무를 향해 손을 내밀게 됩니다. 그 순간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먹으면 죽는다’가 아니라 ‘죽지 않는다’였을 것이고,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는 자기 존재 가치의 확대가 마치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준비하신 복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고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말은 하나같이 인간을 유익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것을 요구할 뿐, 지키면 하나님 같이 된다거나 하는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유익을 담고 있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유익을 보장하거나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로써 그 본분이 무엇인가를 증거할 뿐이고 자기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에 마음 둘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면 인간은 뭐냐?’라고 하면서 불만을 가집니다. 인간의 유익을 언급하지 않는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를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의 유혹의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와에게 있었던 마귀의 유혹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긴 하와에게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선악과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켜 줄 좋은 것, 즉 선한 것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주하는 것보다 선악과라는 좋은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모든 인간 역시 마귀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긴 채 하나님의 말씀아래 거하는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이루기 위해 선악과를 선택하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역사속의 모형으로 존재하며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어 자신이 주체가 된 인생을 꾀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었다’는 것을 선언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접근한다면 결국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사건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적 유익에 뜻을 두신 바가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 육체적 유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헛된 것이고 쓸모없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선악 개념에 붙들려 자신을 주체로 하여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세상은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죽음보다는 지금 현재 육체의 일에 도움 되는 것을 좇습니다. 교회가 그러한 세상의 풍조를 따르며 믿음을 육체적 유익을 위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수준 높은 종교적 실천을 행한다 해도 하나님께는 진노의 자녀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의 나란 존재가 부정되어 질 때 하나님의 약속인 십자가가 그 자리에 세워질 수 있기에 자기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보면서 자신을 유익하게 해줄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 운명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흙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끌어안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과 연합된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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