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7.13 10:22

(11강) 선악과를 먹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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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7-11http://onlycross.net/videos/gen/gen-03071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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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설교>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육체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하지 않던 것을 의식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변화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으로 인간은 어떤 것에도 만족을 모르는 불행한 존재로 전락되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이 왜 만족을 모르는 불행으로 연결될까요?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은 벗은 것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인식하게 된 인간이 행한 것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은 것입니다.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의 상태에서는 전혀 불필요한 행동입니다.

 

 

결국 인간은 눈이 밝아짐으로 해서 불필요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이고, 평생을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을 의식하면서 부끄럽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리기 위한 불필요한 행동을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이 밝아진 자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에도 만족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모든 것에 만족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눈이 밝아진 인간에게는 이미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좋고 나쁨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내 것만 아니라 타인의 것도 바라보면서 비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 먹는 것을 두고 보셨을까요? 선악과로 인해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의 존재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서 마귀의 존재를 드러내셨고 죄가 무엇인가를 확정하시고 15절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행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자기 확대를 위해 행동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벌거벗은 상태로 있는 것보다 벌거벗은 것을 가리는 것이 자기 존재를 지키는 것임을 판단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부끄러움을 가리고 좀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부각되기 위해 행동하게 된 그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좀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의도로 행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신자들은 신앙 좋은 신자로 평가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신앙 좋다는 평가는커녕 신앙 없는 사람으로 치부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교회에서 신앙으로 인정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벌거벗은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눈이 밝아진 인간은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8절에 보면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말합니다.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동산을 걸어 다니셨다는 뜻이 아니라 동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의식했을 때 반응은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자 자신들의 행동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음을 판단하고 숨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기 행동을 기준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혹시 벌 받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생기고, 잘한 것이 생각되면 불안감이 아니라 떳떳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단지 말씀을 어긴 것으로 끝난 것도 아니고, 선악과라는 열매가 훼손된 것으로 끝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과의 관계가 무너졌고 창조물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기쁨과 안식도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은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선악과를 먹고 죄 가운데 있게 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응은 피해 숨은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나와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반응이라면 그 후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동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죄를 회개하는 방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은 인간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신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셨다고 해서 인간이 죄를 깨닫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말에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합니다. 아담의 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담의 두려움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벗은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벗은 것은 부끄러움이지 두려움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은 벗은 것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눈이 밝아져 자기를 바라보게 된 인간의 죄의식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벗었음을 보면서 벗은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싫어하신 모습이니 하나님이 벌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주일 성수를 못해서, 기도를 못해서’이러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일 지키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의 본질적인 죄는 보지 않던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창조될 때부터 벌거벗었습니다. 따라서 벌거벗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이라고 두려워하면서 치마를 만들어 부끄러움을 가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기독교인들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죄인데도 불구하고 죄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난 존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선을 행하고 의를 쌓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애당초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알렸느냐”라고 말씀하신 것도 벗은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벗었음을 알게 된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일을 지키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성경보지 않는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부끄러운 것으로 바라보게 된 것을 문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아담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선악을 판단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어떤 행함으로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우리의 죄를 덮으신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덮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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