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7.20 10:13

(12강) 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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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11-19http://onlycross.net/videos/gen/gen-03111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이 찾아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원될 수 없는 우리를 찾아오심 자체가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하지만 아담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일에 대해 징벌을 내리십니다. 그런데도 아담을 찾아오신 일도 은혜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하나님이 아담을 찾지 않으셨다면 징벌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징벌이 없었다면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고 수고하며 먹고 살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의 효력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이라는 운명에 붙들려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담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는 말씀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있게 하신 여자에게 있음을 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여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여자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여자는 선악과를 먹은 원인을 뱀에게로 미루는 것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뱀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모든 책임은 뱀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책임을 물어 징벌 하실 수도 있지만 애당초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이길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은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이러한 의문 때문에 죄의 기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거나, 하나님이 죄를 창조하셨다는 모순적인 논리를 만들어 내는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우린 흔히 죄의 기원을 마귀에게서 찾게 됩니다. 하지만 마귀를 죄의 기원으로 여긴다면 마귀를 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적 존재로 부각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유일신론적인 기독교의 논리와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죄는 분명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기원, 시작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죄가 타락 이전의 인간 안에 가능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죄가 현실로 드러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선악과라는 장치를 통해서 감추어져 있던 죄가 현실에 드러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은 어쨌든 인간의 선택입니다. 따라서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인간이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죄의 기원을 따져 가면서 책임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죄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징벌을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한 벌의 차원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한 징벌은 죽음입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간은 이미 생명과 단절되고 죽음에 속한 존재가 된 그것이 곧 징벌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과 같은 징벌을 내리실까요?

 

 

먼저 뱀에 대한 징벌을 보면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뱀은 이 징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배로 기어 다니는 것은 맞지만 흙을 먹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는 실제로 뱀이 흙을 먹고 살아가도록 하신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뱀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의 상태는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는 것입니다. 뱀도 역시 흙으로 지음 받았기에 그 본질은 흙입니다. 그렇게 보면 흙을 먹는다는 것은 흙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저주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징벌은 기본적인 삶에 고통이 수반되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남자에게는 노동이라는 고통을 여자에게는 출산이라는 고통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이 죄에 대한 응징이나 저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에서 저주를 받은 것은 뱀과 땅입니다. 그렇게 보면 19절에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선언 역시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는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러한 징벌을 주시는 것일까요? 심판의 의미가 아니라면 굳이 징벌을 주셔서 인간의 삶을 고통에 집어넣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의 질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편안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가 드러났습니다. 세상에 마귀가 존재함도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의 창조물을 훼손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라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이제 세상은 악과 선의 구조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악과 선이 충돌하고 선이 악을 이김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이 창세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15절의 말씀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는 이 말씀이 세상이 앞으로 어떤 구조와 현실로 흘러가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세상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라는 존재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말하는 것은, 남자의 무능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남자 없이 여자로 말미암아 나타난 후손을 뜻합니다. 그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뱀의 머리를 칠자는 예수님뿐이며 예수님이 아니면 누구도 뱀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고 소망해야 하는 입장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벌 안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수고하며 힘들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에서 인생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고하고 힘들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기에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야 말로 환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희망은 뱀의 머리를 치실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오심으로 죽음에 처한 우리에게 생명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삶에서 고통이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에 뜻을 두게 하시는 것이 징벌의 의미입니다. 즉 벌을 주기 위한 징벌이 아니라 저주의 세상 속에 있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저주 받은 땅에서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만 생각한다면 인간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소망의 존재를 약속하셨습니다. 죽은 자인 우리를 살리고 죄를 이기는 승리의 길로 가게 하실 분으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떠야 하는 것은 저주 받은 땅의 세계가 아니라 하늘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곳이 바로 하늘에 있음을 생각하며 모든 소망이 그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항상 수고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로 살아가는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을 참된 현실로 바라보는 그가 복된 자입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위엣 것을 찾고 소망하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이 열린 복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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