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8.03 09:59

(14강) 가인과 아벨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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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1-6http://onlycross.net/videos/gen/gen-04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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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설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면 동산에 있는 인간에게는 더 이상 생명을 얻을 길은 없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이 아무리 환경이 좋다고 해도 그 곳에 계속 머무는 것은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는 곳에 있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신 것은 단순히 심판의 의미라기보다는 생명에 대해 절망적인 상태가 된 인간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부터는 선악과를 먹고 생명에서 떠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간섭하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시고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가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문의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에도 구속 사역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가인을 낳았을 때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합니다. 그 의미로 ‘가인’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얻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벨을 낳았을 때는 가인과 다르게 단지 ‘아벨을 낳았다’고만 합니다. 그런데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며 기뻐했던 것을 무색하게 하는 범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3:15절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여자의 후손이 있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마 가인을 여자의 후손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인을 낳았을 때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며 기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의 참된 의미를 몰랐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남자와 상관없이 오직 여자만으로 인한 후손을 뜻합니다. 하지만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즉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남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아담과 하와가 가인에게 희망을 두었고 그래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한 아들로 바라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인은 범죄 함으로 아담과 하와의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가인의 범죄는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아벨을 죽인 행동만을 범죄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인은 이미 죄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고 그 결과가 아벨을 죽인 행동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범죄의 동기는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에 있습니다. 농사를 짓던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양을 치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는데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를 제물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가인이 제물을 잘못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피가 없는 곡식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곡식을 제물로 하는 소제를 제사규례의 하나로 세우신 것을 보면 제물이 곡식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초점 두고 있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벨을 기뻐하셨으므로 그의 제물도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가인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때문에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보시고 사람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좋은 제물, 나쁜 제물의 구별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선악 개념에 의한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시 50:8절에 보면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는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고 말합니다. 수소를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고기를 먹으시는 것이 아니고 염소의 피를 마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자가 헌금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그 돈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제물을 가지고 나오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미 6:8절에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자가 하나님께 가지고 나갈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는 그 어느 것도 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치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해 남게 된 것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반면에 두 달란트를 받은 종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하여 배를 남겼는데 주인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남긴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의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이 받은 것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감사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것을 자기의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고 받은 것을 바치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헌금만 하면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가인과 아벨의 제물이 어떻게 달랐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을 바쳤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바쳤습니다. 첫 새끼를 바쳤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의 출처를 하나님께 두고 있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의 제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을 바쳤습니다. 자신이 농사해서 얻은 것 중에 얼마를 바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각기 자신의 소산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아벨의 제물에는 감사가 있고 가인의 제물에는 감사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은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얼마나 바치는가가 아니고 어떤 마음인가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재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많이 바치면 복 받는다’는 말이 교회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 11: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보다 더 나았던 것은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아벨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로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의 출처를 하나님께 둠으로 인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물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달랐던 것입니다.

 

 

가인은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으로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가인은 제물을 바친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악함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치든 하나님은 제물을 보시고 우리를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이 받아주실 수 없는 더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하시고 거룩한 자로 여겨주신 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있는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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