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8.10 10:11

(15강) 가인의 살인

조회 수 346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창 4:7-15http://onlycross.net/videos/gen/gen-04071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설교>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쳐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 때문에 안색이 변하며 분노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이러한 선을 행할 수 있었다면 아벨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문제를 보는 것이라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 외면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과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을 부당하게 여기며 분노하는 것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아벨을 살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인은 자신 역시 아벨과 동일하게 정성으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제사가 정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 부당한 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러한 가인의 속성은 지금도 여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금하는 것을 정당한 신앙 행위로 간주합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그 외에 종교 활동을 할수록 정당함은 더 크게 향상될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문제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인간이라는 것은 망각하게 되고 복 받아야 하는 기독교인이라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만 실패가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가인처럼 안색이 변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에 분노하게 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아벨을 미워하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그 마음을 억누르며 죽이지 않는 것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매일 죄를 다스리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다스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항상 자기 정당성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죄로부터 분리하여 선한 존재로 부각되고 싶어 하는 인간이 하나님이 자신을 받지 않으시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기 번성을 꾀하는 인간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포기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인의 살인 행위는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롬 7:18-20절에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합니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죄라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행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자기 속에 거하는 죄에 있다고 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늘 죄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다고 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며 그것이 인간의 속에 거하는 죄에게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현실인 것입니다. 내 의지로 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내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에게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이 무슨 수로 선을 행하며 죄를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가인의 살인이 바로 이 같은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고 그것이 곧 우리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여전히 반발합니다. 아벨을 죽인 자신을 생각하기보다 여전히 아벨만 찾으시는 하나님에게 반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자신의 악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이것이 인간의 부패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땅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살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가인은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호소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죄벌이 너무 무겁다고 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게 된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살아가게 된 인간은 이제 땅에서 무엇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안식과 평화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만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자기의 죄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벌을 주시면 죄를 뉘우치며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옳은데 가인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하면서 하나님의 벌이 너무 무겁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죄를 생각하지 않는 가인에게 더 무거운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시면서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십니다. 가인을 저주하신 하나님이 오히려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것에 말씀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주 받을 자를 보호하심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죽옷이 아담과 하와에게 은총의 표인 것처럼 가인에게도 죽임을 면하는 표를 주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표를 주시지 않으면 가인은 그 죄로 인해 땅에서 유리하고 다니다가 죽임을 당할 입장입니다. 따라서 가인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표를 본다면 죽임을 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인과 동일한 죄의 종입니다. 죄에게 다스림 받으면서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죽일 수 없도록 보호하는 은총의 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신자는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 있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참여한 자리는 죄로 인한 형벌이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용서와 은총의 자리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가 없다는 말씀대로 신자는 정죄가 없는 복된 세계에 이미 참여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죄로 인해 심판하고 판단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신자 또한 서로를 판단하고 비난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깨닫게 될수록 죄로 가득한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됩니다. 땅의 것이 아닌 위에 것에 마음을 두면서 위의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처럼 땅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누리게 되는 복이며 은혜입니다.

 

 

그렇게 보면 아벨의 죽음은 전혀 억울하지가 않습니다. 아벨은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어떤 순간에서도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8 창세기 (28강) 축복과 저주 신윤식 2014.11.16 3473
467 창세기 (27강) 언약의 증거 신윤식 2014.11.09 2973
466 창세기 (26강) 생명의 피 신윤식 2014.11.02 3216
465 창세기 (25강) 노아의 제사 신윤식 2014.10.26 3272
464 창세기 (24강) 까마귀와 비둘기 신윤식 2014.10.19 3591
463 창세기 (23강) 방주 안으로 신윤식 2014.10.12 3138
462 창세기 (22강) 심판과 방주 신윤식 2014.10.05 3384
461 창세기 (21강) 은혜 입은 노아 신윤식 2014.09.28 3361
460 창세기 (20강) 하나님의 한탄 신윤식 2014.09.21 3732
459 창세기 (19강) 육신이 됨이라 신윤식 2014.09.14 3408
458 창세기 (18강) 하나님과 동행 신윤식 2014.09.07 3628
457 창세기 (17강) 죽었더라 신윤식 2014.08.31 3125
456 창세기 (16강) 가인의 후손 신윤식 2014.08.24 3578
» 창세기 (15강) 가인의 살인 신윤식 2014.08.10 3465
454 창세기 (14강) 가인과 아벨의 제사 신윤식 2014.08.03 3733
453 창세기 (13강) 생명의 길 신윤식 2014.07.27 3502
452 창세기 (12강) 징벌 신윤식 2014.07.20 3817
451 창세기 (11강) 선악과를 먹은 후 신윤식 2014.07.13 4158
450 창세기 (10강) 뱀의 유혹 신윤식 2014.07.06 3701
449 창세기 (9강) 남자와 여자 신윤식 2014.06.29 4186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31 Next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