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8.24 10:16

(16강) 가인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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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16-26http://onlycross.net/videos/gen/gen-04162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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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설교>

 

아벨을 살해하고 여호와 앞에서 쫓겨난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그곳에서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게 됩니다. 아내와 동침했다는 것은 당시 가인 외에 여자가 있었다는 뜻인데 성경의 내용대로만 하면 가인 외에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궁금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주 만물과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기원에 대해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는 계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떻게 가인 외에 다른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궁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는데 에녹을 낳고 성을 쌓은 후에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성을 쌓는 것은 자기 영역을 든든히 구축하여 지키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높이고 영웅시함으로써 자기 또한 높임 받고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성향이고 이러한 성향이 후손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부터 보면 가인의 아들 에녹으로 시작하여 후손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에 라멕이 언급되는데 라멕이 아다와 씰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여러 후손을 두게 됩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발의 아우 이름은 유발인데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고,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기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인 이후에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많이 발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인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고 생활 여건도 나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나아진 것이 있을까요? 23절을 보면 라멕은 자기 아내들을 향하여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였고 자신을 상하게 한 자는 그가 소년이라 할지라도 죽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지 않고 죽이는 것으로 보복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멕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의 성향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자신의 것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 때문에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성향이 라멕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복심은 오늘날의 인간에게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고 오늘 우리에게서도 드러납니다.

 

 

라멕은 24절에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고 말합니다. 가인을 상하게 한 사람은 7배의 벌을 받지만 자신을 상하게 한 사람은 77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한 보복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라멕이 드러내고 있는 인간의 성향은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문명과 문화만 발달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격에 초점을 둔 가르침도 있어 왔습니다. 수많은 종교가 발생했고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도와 가르침을 내 놓으며 인간을 개선하고 바꾸는 일에 힘썼습니다. 바르게 가르침 받고 참된 도를 깨달으면 인간 또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담긴 것을 보면 인간은 결코 달라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인의 성품, 라멕의 성품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이 달라지고 아름답게 되기를 원하는 생각 또한 헛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달라지게 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달라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면 예수님의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는 주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드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는 포기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대도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슨 일을 이룬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만 심판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가인을 지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가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는 가인을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죄 아래 있고 가인처럼 살인을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가인과 동일한 성품의 인간이기에 가인의 죄를 심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이 말하는 용서의 의미도 남의 잘못을 덮어 주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누군가를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용서를 받아야 할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죽는 것이 당연한 가인이 죽임을 면하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인을 하고 죽어야 하는 가인이 살아있는 자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가인도 가인의 후손도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고 라멕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무지했기 때문에 자신을 상하게 한 자에게 77배로 갚겠다며 보복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현실에 하나님이 조치하신 것이 아벨 대신이 다른 씨, 즉 셋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셋은 가인보다는 나은 다른 성품의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인 만큼 셋 또한 가인과 동일하게 죽은 자로 태어났을 뿐입니다.

 

 

셋의 등장은 가인과 달리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는 존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인과 동일한 성품의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참된 진리의 길로 나아가게 됨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온 마음에 두게 되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이것이 가인의 성향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식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가인과 그의 후손과 같은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성을 굳게 쌓는 것을 필요로 하고, 문명과 문화의 발전을 위해 야발, 유발, 두발가인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아벨 대신 셋을 주셨다고 해서 셋이 아벨을 대신해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한 것도 없습니다.

 

 

셋은 단지 아벨 대신에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서 그 역시 아들을 낳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사람들이 여호와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여호와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셋이 에노스를 낳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벨의 죽음까지 극복하며 성취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인간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물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여호와의 이름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신자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되면 내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기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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