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8.31 10:05

(17강) 죽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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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1-17http://onlycross.net/videos/gen/gen-05011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설교>

 

5장의 아담의 계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낳았으며’‘살고’‘죽었더라’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이 ‘죽었더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낳았으며’‘살고’는 크게 의미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집안에서 어떤 환경 속에 낳았고 어떻게 살았든 ‘죽었더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게 된 이유가 죄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은 저주 받은 땅에서 그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을 아담의 계보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오래 사는 것에 있고, 오래 살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죽음만큼은 대항할 수 없습니다.

 

 

아담의 계보를 보면 마할랄렐(895세)과 라멕(777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9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므두셀라가 969세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77세라고 하는 우리나라 남자와 비교하면 12배 이상을 산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죽습니다.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죽었더라’로 그 인생의 마지막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었더라’고 끝나는 아담의 계보에 유일하게 ‘죽었더라’가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에녹인데 에녹의 이야기는 죽음의 인생이 어떻게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는가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아담의 계보가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은 죽음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외면하고 싶어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고 피하고 싶은 문제라면 죽음이 무엇인지, 사람이 왜 죽게 되었는지 등의 문제에는 관심을 두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행과 어둠의 의미로 인식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죽음의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염세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물론 죽고 싶다는 생각에 붙들려 있다면 그것을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도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삶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고 있는 현대인의 인생에 대한 시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모두가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끝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몇 십 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지금의 그 자리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언제 그 자리까지 왔는지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정신 차려 보면 이미 끝에 도달했음을 실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외면함으로 인해서 현재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이왕 죽을 인생 행복하게 살다 죽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데 마음을 빼앗겨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면 은혜를 따라 인간의 죽음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며 살다가 결국 죽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장막 집으로 묘사합니다. 우리의 몸은 무너지지만 하늘에는 무너짐이 없는 영원한 집, 즉 영원한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시 초대 교회가 재림을 곧 이루어질 사건으로 알고 기다렸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지체가 되자 자신들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불안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몸은 무너지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몸을 입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사망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이어지는데 그 영원이 사망과 생명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죽으면 그만이다’는 세상의 사고방식에 붙들릴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전부가 아니고 마지막이 아님을 알기에 성경이 증거하는 생명의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장막 집을 벗는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세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불행도 절망도 어둠도 아니라 오히려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신앙 안에서는 땅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은 영원한 몸을 입고 사망이 아닌 생명에 참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속에 소망으로 자리하여야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낳고 살고 죽는 것으로 끝나는 인생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생명의 빛이 비추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우리 인생이 죽음이 아닌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 삶이 복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뻔한 이야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어디로 향해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보배라는 말은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게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사로와 부자 둘 중에 인생을 제대로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 기준으로 보면 부자는 성공했고 나사로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를 생각하면 인생을 제대로 산 사람은 나사로입니다. 부자에게는 재물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 속에 그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보배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그 가치에 대해서도 무시했겠지만 그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르자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드러난 것입니다.

 

 

신자는 그것을 알았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에 인생의 가치를 소유에 두지 않습니다. 소유도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소유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담의 계보에 가인과 아벨은 빠지고 아벨 대신 주신 셋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계보는 택한 자의 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낳고 살고 죽는 것이 전부인 인간의 운명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죽음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는 에녹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운명에 예수님이 들어오신 그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운명에 예수님이 들어오셨다고 해서 소유가 늘고 성공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몸으로 죽음이 없는 영원한 세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무한한 은총입니다. 이 은총이 우리의 만족이 된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능력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낳고 살고 죽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삶이지만 신자의 다른 점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이 없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를 위해 사는 ‘살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낳게 하시고, 하나님이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이후에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심을 믿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믿음의 현실은 참으로 가난합니다. 답은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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