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09.07 10:14

(18강) 하나님과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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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18-32http://onlycross.net/videos/gen/gen-05183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설교>

 

아담의 계보는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 자체가 죽음에 처한 인간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죽음 안에서는 몇 년을 살았고 무엇을 이루었든 죽음과 함께 의미 없는 것으로 사라지는 허상일 뿐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아담의 계보에 죽음과 상관없는 에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녹에 대해서는 21-24절에서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에녹의 일생에는 ‘죽었더라’대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데려가시든 죽었든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세상에서 존재하다가 죽음과 사라지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영원이 사망이냐 생명이냐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담의 계보에서 에녹은 중요한 것을 증거하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녹을 통해서 사망이 아닌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계보에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이 등장하는 것은 에녹이 간 길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이기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결국 헛된 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죄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죽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에녹 시대에는 예수님이 없었는데 에녹은 어떻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에녹에게만 있는 특이점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우리의 시각에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 말은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즉 므두셀라를 낳기 전까지는 그의 인생도 ‘죽었더라’를 향해서 흘러갔던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에녹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과의 동행의 의미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항상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묵상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에녹의 동행을 인간의 행위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동행이란 나 혼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을 뜻합니다. 나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나만을 위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동행이 의미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한 그 분을 위한 길을 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행에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동행이 본인에게는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동행을 하든 그와의 동행이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면 동행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말한다면 하나님이 내게 동행해주신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기쁨과 힘과 위로가 되는가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고 위로와 힘이 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동행이 아닌 다른 것에서 기쁨과 위로와 힘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가의 여부는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이 기쁨이 된다면 세상에서 다른 기쁨이 되는 것을 찾아 헤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둠입니다. 그리고 어둠의 세상이 빛이 오셨습니다. 어둠의 상태에서 빛이 오신 것은 빛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이 있어야 빛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세상의 불의함에서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어둠을 사랑합니다. 빛 아래에서 어둠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데 사라질 어둠에 소망을 두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동행해주심으로 인해 빛을 보게 되고 빛을 빛으로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지만 빛을 바라보는 것이 동행입니다.

 

 

이것은 에녹의 동행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보면 에녹의 동행은 므두셀라를 낳은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만으로는 그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에녹에 대한 다른 증거를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다서 1:14,15절을 보면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에녹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심판은 노아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보면 에녹은 이미 노아의 심판을 알았고 그 심판을 당대의 사람들에게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에녹이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지은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므두셀라는 ‘창던지는 자’란 뜻입니다. 창던지는 자라는 것은 단지 창던지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족을 지키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부족을 지키는 창던지는 자가 죽는다면 그 부족은 전쟁에서 패한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의 이름에는 다른 뜻도 있는데 그것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에녹에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았고 그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로 짓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노아 홍수는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발생했습니다.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나이가 187세이고, 라멕이 노아를 낳은 나이가 182세입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가 됩니다. 그리고 창 7:11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 심판이 시작되었는데 그때의 므두셀라 나이가 그가 죽은 969세였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대로 심판이 임했음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알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실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이 심판을 생각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늘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서 에녹이 기대고 소망 둘 곳은 하나님 한분뿐임을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히 11: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에녹의 믿음이 바로 심판에서의 구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은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이 심판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심판이 세상에 확정된 하나님의 일임을 안다면 우리가 믿고 기대고 위로 받고 힘을 얻을 것은 어쨌든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인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심판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굳이 길거리에 서서 세상이 심판 받는다고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늘에 보물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세상에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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