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0.05 10:13

(22강) 심판과 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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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7:1-12http://onlycross.net/videos/gen/gen-07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설교>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이유로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시고 그 일을 행하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올법한 질문은 심판 대신에 악한 사람들의 마음을 선하게 바꾸시고 세상은 계속 보존하시면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시라면 악한 마음도 능히 선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물로 쓸어버리시는 심판이라는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십니다.

 

 

이상한 것은 사람이 악하다는 이유로 심판하시면서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남겨 두셨다는 점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노아와 그의 가족은 악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의 의로움을 보시고 심판에서 구원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그 마음에 전혀 흠이 없는 선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범죄 전의 상태와 같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그런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즉 비록 하나님이 노아의, 의로움을 보셨다고는 하지만 노아가 아담의 범죄 전의 상태와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의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노아 역시 그 마음이 악했다면 왜 노아는 구출하셨을까요? 어쨌든 악한 존재였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나았기 때문일까요? 그렇다 해도 결국 악한 인간일 뿐입니다. 똑같이 심판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아를 구출하신 것은 노아의 구출과 그를 존재하게 하시는 것으로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건에 담긴 의미에 바르게 접근하는 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데 중요한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홍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된 것을 노아가 의로웠기 때문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섣불리 ‘우리도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 결론으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물로 심판하지는 않으시겠다 하셨지만 불로 행하시는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홍수 후의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지할 것은 노아의 구원입니다. 노아의 구원의 내막을 알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불의 심판에서 구원 받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위한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노아의 구원은 노아의 의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노아의 의가 구원의 근거라면 노아 이후의 모든 사람은 노아와 같은 의를 행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한 구절의 말씀에 의해 막히게 됩니다. 그것은 6:8절의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입니다.

 

 

노아에 대한 이야기는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노아의 모든 것은 은혜를 입었다는 것으로 연결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의인이고 완전한 자로 여김 받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여 방주를 짓게 된 것도 모두가 은혜를 입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를 노아 되게 했다는 결론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의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홍수 사건의 중심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시고 은혜 입은 노아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노아 외에 모든 사람도 은혜를 입히셔서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큰 심판에서의 구원을 통해서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홍수 사건의 중심에 은혜가 있다는 것은 2,3절의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는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방주에 들어가게 한 짐승을 왜 굳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누는 것일까요?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속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로 세상을 쓸어버리시는 것은 부정한 것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정한 것은 심판에 속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주에 들어감으로 구원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부정한 것은 방주에 들어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주에 있게 된 것은 정결한 짐승이 함께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노아 또한 자신의 의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는 말씀드렸지만 그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가 없습니다. 그것을 방주의 정결한 짐승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8:20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라고 말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행한 것은 제사였는데 제물을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린 것입니다. 부정한 짐승도 있는데 정결한 짐승으로 제단에 드린 것은 하나님은 부정한 것이 아닌 정결한 것만을 받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땅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보존되는 혜택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홍수 심판과 노아의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분명히 알 것은 구원의 기준은 인간의 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결한 존재가 함께 함으로 해서 부정한 존재가 구원을 받은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구원은 정결한 존재의 등장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벧전 3:20-21절에 보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물로 뒤덮였습니다. 물 아래의 세상은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물 위에 떠 있습니다. 죽음의 세상 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물에서 건짐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표, 곧 세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물에서 죽어야 할 부정한 존재가 정결한 분의 희생과 함께 하심으로 심판에서 건짐 받았다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정결한 분으로 오셔서 자신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리시고 부정한 우리에게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김 받게 하신 그 은혜로 인해 산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 심판이 약속되어 있는 세상에서 신자가 증거 해야 하는 것은 은혜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심판과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주의할 것은 방주 안의 노아를 자신으로 형상화 하여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방주 안의 노아로 형상화 하게 되면 자신을 죽음의 존재로 보지 않고 구원 받은 존재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물속에 갇힌 죽음의 존재인 나를 건지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은혜는 묵살되고 대신 자신이 방주 안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인간적 시도만 있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죽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죽은 존재임을 알 때 비로소 죽음에서 건지시고 살리시고 예수 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나 구원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의 죽음만 보게 됩니다. 그리고 긍휼과 사랑의 크심으로 인해 감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의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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