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0.12 09:59

(23강) 방주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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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7:13-24http://onlycross.net/videos/gen/gen-0713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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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14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15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17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설교>

 

16절에 보면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고 말합니다. 방주에 들어간 것들 모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의 문은 하나님에 의해서 닫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들어갈 대상을 정하시고 부르시고 들어가게 하신 후에 문을 닫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심판에서 방주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행해지고 얻어진다는 것을 방주를 통해 이미 보여주신 것이 됩니다.

 

 

그렇게 보면 노아의 방주가 예표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로는 결코 죄를 이기고 사망으로부터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방주로 말씀하는 것이고 구원 받은 인간이 할 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고 감사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사건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해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성경을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과 방주의 구원을 믿습니까? ‘심판과 방주가 역사적 사실임을 믿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과 방주의 의미, 다시 말해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과 방주를 믿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홍수가 땅에 사십일 동안 계속되어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오르게 됩니다. 천하의 높은 산도 모두 물에 잠김으로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은 모두 죽고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방주 안에 함께 있던 생물들만 남게 됩니다. 이들이 방주 안에서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방주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방주 밖의 심판을 보며 하나님의 구원에 놀라며 감사하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에 놀라지 않습니까?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불려 나왔고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짐승들을 포함해 노아와 그의 가족들까지 물에 수장된 사람들의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노아와 함께 많은 생물들을 하나님이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짐승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자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순종하게 하시고 방주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하면 구원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아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준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고 구원 받은 것이 신자라면,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을 우리를 순종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기 때문에 구원은 놀라운 기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기적을 알게 된 신자는 이미 기적을 경험했고 기적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기적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삶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 역시 복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미 방주라는 복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에 있는 신자가 모든 현실에서 흔들림이 없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고 말합니다.

 

 

땅은 하나님에 의해서 쓸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쓸어버림을 당하기 전에 땅에는 인간이 원하고 추구하는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쓸어버림을 당할 것들일 뿐이며 비록 지금은 존재한다고 하나 실상은 사라질 허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방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주 안에서는 땅의 것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재물을 들고 들어갔겠습니까? 방주 안에서는 재물도 금은보화도 의미 없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구원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구원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세상과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신자에게는 신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세상과 구별되어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런 존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쓸어버린 심판만을 생각한다면 홍수 이야기는 절망과 두려움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주 이야기가 존재함으로써 홍수 이야기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말하고, 죽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리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과 저주를 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무한한 은혜를 말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심판이라는 엄청나고 두려운 사건을 통해서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심판의 역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고 변화될 수 있다면 방주 이야기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판을 체험하게 해서 변화되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통해서도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홍수 후에 인간이 무엇을 추구했는가를 드러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계획과 생각이 항상 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홍수 전의 인간의 상태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주가 등장하고, 방주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경험해도 인간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특히 출애굽의 사건을 보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의 기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기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습니다. 직접 몸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기적과 구원이라면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로 들어간 그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반응합니다. 홍해의 기적은 그들의 삶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금 한 순간의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매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은 무엇으로도 변할 수 없는 존재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기적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것이 악이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있게 하신 모든 삶에서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 없이 악만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구원에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 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노아에게 방주는 구원의 길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내용으로만 다가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실제 사건이 되어야 하고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이 아닌 불로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종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때에 세상에 남을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 남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시고 영원한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은혜가 크고 감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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