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0.19 10:03

(24강) 까마귀와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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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8:1-12http://onlycross.net/videos/gen/gen-08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설교>

 

하나님은 손수 창조하신 세상을 심판하셨고 또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입장에 있습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하든 반발을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심판은 반드시 시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노아를 통해서 증거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을 세상 어딘가로 대피시켜 놓으신 것이 아니라 방주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는 세상을 덮어버린 물 위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방주 안에 있던 노아는 세상이 물로 인해 심판을 받고 있음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가 곧 구원의 능력이며 방주에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고 구원에 참여할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참여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라고 말합니다.

 

 

홍수가 시작될 때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7:11) 합니다. 터졌던 샘과 열렸던 창문이 닫힘으로 비가 그친 것입니다. 하늘의 창을 열고 닫은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한다면 심판의 시작과 끝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이 닫히고 비가 그치며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며 방주에서 나온 무리가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심판의 초점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홍수 심판은 단순히 죄에 대한 심판에 그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내막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없이 하나님의 구원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심판을 배경으로 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심판을 심판 자체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심판에서 구원된 무리가 있으며 그들이 구원된 원칙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 옳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고 방주에서 나오게 된 내용을 가지고 ‘우리도 노아처럼 믿음으로 살아서 심판에서 구원 받은 자가 되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본 뜻에 어긋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일단 심판에서 언급될 수밖에 없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죄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노아 역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죄로 가득하다 해도 세상 전부를 쓸어 버리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이들만이라도 살게 하면 안 되는가라는 생각이 앞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과 입장까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납득을 하든 하지 않든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드러내며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세상을 완전히 심판하시고 새롭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세상에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시고 그 질서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마지막 때 영원히 심판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세워진 질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질서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같이 되고자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세상의 질서가 된 것입니다. 홍수 심판은 이러한 세상을 용납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홍수 후에 새롭게 세워진 질서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홍수 후의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질서위에 세워졌음을 말해주는 것이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한다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증거로 구름 속에 두신 무지개가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질서 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비가 그치고 물이 점점 줄어들어 산들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노아는 사십 일을 지나서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보냈는데 까마귀는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을 뿐 방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이처럼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 보낸 것은 지면에서 물이 줄었는지를 알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아직 지면에 물이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옵니다.

 

 

노아는 다시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 보냈는데 저녁때에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옵니다. 그것으로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들었고 식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시작됨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비둘기가 돌아온 것은 아직 지면에 거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방주에서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칠일을 기다려 세 번째 비둘기를 내 보내자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고 지면에 물리 걷혔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노아는 비둘기를 통해서 심판이 끝나는 땅의 상태를 알게 됩니다. 즉 비둘기가 세상의 상태를 노아에게 알려준 것이 됩니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까마귀의 특성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까마귀는 죽은 동물의 시체를 좋아합니다. 시체가 그들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죽은 시체가 둥둥 떠 있는 방주 밖의 세상은 까마귀에게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둘기는 시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까마귀인가 비둘기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까마귀입니다. 시체로 가득한 죽은 세상에 내 앉을 자리를 찾으며 방주는 아예 잊은 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를 비둘기 되게 하시고 세상에는 내가 앉을 곳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 방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심판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된 신자는 이런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있을 곳이 없음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안식처로 여기며 주께로 돌아감으로써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욕망을 이루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곳입니까? 그것은 까마귀로 세상을 헤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장차 심판으로 마무리 될 곳입니다. 지금은 굳건한 삶의 터전으로 보이는 것들도 허물어지고 사라질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신자가 앉을 곳이 없습니다. 앉아서 편히 쉴만한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쉼이 있는 안식처라는 것을 안다면 주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늘 주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으로 신자는 세상이 살만한 곳이 아님을 전하는 비둘기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실은 늘 까마귀로 드러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를 좇는 참된 삶인가를 알면서도 세상에 앉을 자리를 찾으며 세상의 썩은 것을 필요로 하고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자신으로 인해 절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까마귀인 나를 비둘기의 길로 가게 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홍수 후의 세상의 질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죽은 세상과 어울려 살기를 원하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나를 예수님에게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기어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하시고 감사의 고백을 이끌어 내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앉을 자리가 바로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기를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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