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1.09 09:50

(27강) 언약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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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9:8-17http://onlycross.net/videos/gen/gen-09081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설교>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심판 자체가 사랑이 아니라 폭력, 분노로 비춰지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시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때문에 설령 세상이 죄로 가득하다고 해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다운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반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며 세상을 심판해도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서의 믿음 수준일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11절)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후손과 방주에서 함께 했던 모든 생물들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장차 세상이 또 다시 홍수 심판 전처럼 죄로 가득해진다고 해도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홍수로는 심판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는 심판하겠다는 뜻일까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두고 장난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죄에 대해 다시는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면 왜 처음부터 언약을 세우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8: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지만 다시는 그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고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같은 언약을 홍수 심판 전에 세우셨다면 심판 대신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관용과 자비가 드러났을 것이고, 그것이 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에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인해 자리하는 의문은 심판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셔서 노아와 그의 가족과 여러 생물을 살리셨다면, 8명이라는 적은 수의 노아 가족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실 수도 있을 것이고, 아예 심판을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노아의 그의 가족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생물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세상을 다시 창조하셨다면 그나마 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남기시고 세상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시작된 세상이 홍수전과 다른 모습의 세상으로 발전된 것도 아닙니다. 구원 받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로부터 세상에 사람들이 퍼졌지만 세상은 또 다시 악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결국 홍수전과 동일한 죄의 상태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이것만 두고 본다면 하나님의 홍수 심판은 아무런 변화와 효력도 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끝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홍수 심판을 단지 죄에 대한 심판으로 봤을 때 가능한 생각들입니다. 이 말은 홍수 심판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로만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홍수 심판과 하나님의 언약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내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홍수 심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노아의 그의 가족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부름 받은 도구일 뿐입니다. 이 일을 위해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셨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음으로 인해서 방주를 만들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노아의 구원에 초점을 두게 되면 관심은 ‘노아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로 향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순종이 구원의 한 조건으로 부각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고 복 받는 길입니다.’라며 행함을 요구하는 교훈적 내용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분명한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계시하고 증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도 심판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좀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라는 생각이나 ‘심판을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성경을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여전히 세상은 죄로 가득할 것임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즉 노아의 그의 아들들로 인해 퍼지게 되는 세상 역시 악하다는 것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 역시 악한 존재이며 심판 받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해도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홍수로 멸하는 일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세우셨고 언약대로 행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죄로 가득한 세상에 무지개가 나타났을 때 그 무지개가 의미하는 것은 죄로 가득한 세상이 심판을 받지 않고 보존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라는 것이 됩니다. 이 언약으로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벧전 3:20-21절을 보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말합니다.

 

 

물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따라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물에서 구원 받은 것은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으로부터 건짐 받은 것이 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악하고 더러운, 즉 물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표, 세례라고 말씀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에서 건짐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의 악함과 더러움으로 인해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심판에 대해 다른 기준으로 세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십자가로 확증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 되며 그것이 심판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수 심판 후의 세상에서 심판에 이르는 죄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것을 사도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는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언약은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물에 나를 건지신 부활의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무지개가 나타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언약의 증거인 무지개가 여러분의 마음에 세워짐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더 깊이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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