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4.11.16 10:05

(28강) 축복과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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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9:18-29http://onlycross.net/videos/gen/gen-09182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설교>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하루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알리고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고 얼굴을 돌이켜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술이 깬 후에 함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알고 함을 향하여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고 저주합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에 대해서는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6,27절)고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홍수 심판이 끝난 후의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절을 보면 심판이 끝나고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게 됩니다. 노아의 세 아들은 심판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세상이 죄로 가득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고 선한 세상으로 새롭게 건설되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것으로 이어져야 심판의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구원 받은 아들 중에서 저주 받은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저주가 아니라 후손 모두가 저주 받은 자로 등장합니다. 반면에 축복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세상은 축복과 저주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홍수 후의 세상에서 함과 같이 하면 저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저주에 속한 자로 드러난 함이 어떻게 방주 안에 있게 된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에 속했고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한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내막이 함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함을 저주하는 것입니까? 이왕 구원받았다면 실수가 있다고 해도 덮어주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함을 저주하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죄를 범하면 탈락될 수 있음을 말해주기 위함일까요?

 

 

노아의 이야기는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 마땅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함의 저주 역시 구원에서의 탈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는 세상에서 저주와 축복은 어떻게 나누어지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이 저주를 받게 된 이유를 보면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인제공자가 노아라는 점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벗고 잠이 든 것이 원인인데 노아의 실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하체를 본 함이 한 행동은 두 형제에게 그 사실을 알린 것 뿐 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다는 사실도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들이 분문의 내용을 사회적 통념이나 도덕적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때문에 본문의 내용은 어버이날에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사람은 복 받고 효도하지 않으면 저주받는 식으로 사용할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노아는 함의 행동을 부모에 대한 자식의 좋지 않은 태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함과 같은 속성에 있는 자는 저주 받는다’는 취지에서 함을 저주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함에게서 나타난 저주 받을 자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함이 한 행동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린 것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버지의 벌거벗은 하체는 노아에게는 수치이고 부끄러움입니다. 따라서 함의 행동은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누군가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았을 때 그것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는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홍수 후의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 자체가 그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보지 않으시고 가려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습니다. 노아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방주에서 나온 후에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하여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함이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지 않고 알린 것은 하나님의 은혜성에 벗어난 것이었기에 저주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들어가 옷으로 하체를 가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수치를 가린 하나님의 은혜에 부합된 행동이기에 축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축복과 저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축복의 길이고 무엇이 저주의 길이 되는가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내용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은혜로 말미암아 충만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치를 드러내는 함의 속성으로 번성한다면 수치를 가려주신 은혜의 세상은 가려지고 타인의 수치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세상으로 번성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노아와 함을 비교하면서 ‘함을 저주한 노아가 심했다. 아니다 함이 불효했으니 저주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판단하고 저울질 한다면 그것이 곧 나는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타인의 행동을 따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함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의미는 우리의 부끄러움, 수치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신 것으로 알리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자기들의 손으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 대신 하나님이 손수 가죽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간의 수치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려진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로 증거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신 은혜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수치스러운 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깨끗하고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만약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서로의 행위만을 바라본다면 함처럼 행위에서 수치를 찾고, 마치 자신은 수치가 없는 것처럼 상대방의 수치를 드러내는 일에 앞장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음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지막은 저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셈과 야벳의 가려주는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성과 일치되는 것이기에 그것이 곧 축복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야벳이 창대하게 된다는 것이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10장에 등장하는 야벳의 족보를 보면 셈과 함에 비해 초하라기 짝이 없습니다. 창대하게 하신다는 축복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가문으로 등장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벳의 축복의 핵심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에 있습니다.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 곧 야벳이 창대해지는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셈의 족보에는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은 알다시피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셈은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족보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속했다는 것은 생명에 속했다는 뜻입니다.

 

 

눅 3장에 보면 예수님으로 시작하는 족보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까지 올라갑니다. 그 족보에 셈이 속해있습니다. 함은 저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면 야벳은 왜 없을까요? 셈의 장막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야벳은 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창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것을 누리는 복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늘 여러분의 마음에 생생하게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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