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2.10 17:25

(106강)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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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4:4-8http://onlycross.net/videos/eze/eze-4404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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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5.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 바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고

6.너는 반역하는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7.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며

8.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설교>

신자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길로 가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뭔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항거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자신을 붙잡아 끌어가는 것이 현실임을 깨달으며 그 힘에 붙들려 성경이 증거 하는 진리로 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진리로 가고 싶은 마음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습니다. 이유는 관심 밖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관심이 아니라 자기 영광이 관심으로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진리로 갈 수 없는 이유이며 한계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의 길에 걸림돌이며 그 걸림돌을 스스로 넘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설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자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선악 열매를 먹은 것으로 확인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진리를 알고 진리로 가고자 한다면 이것부터 이해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진리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끊임없이 자신의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자신의 가능성, 즉 인간의 가능성을 고집하는 세상에 의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에 의해 죽으셨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도 단지 종교적인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를 반대하셨고 유대교와 다른 주장을 하셨기 때문에 유대인의 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하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 지금의 기독교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인 자신을 예수님의 편에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유대인이 예수님에게 분노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진리로 갈 수 없다는 심각성이 있습니다. 왜 진리로 갈 수 없는가 하면 반드시 종교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종교적인 문제도 아니고 교리적 대립도 아닙니다. 물론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유대교라는 종교적인 문제와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교리, 즉 율법을 사수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진리를 지키기가 위한 신앙적 행위였던 조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대교라는 종교와 율법을 사수하고자 하는 그 이면에 진리를 원치 않는 인간의 속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아닌 종교로 가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율법이 진리로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진리로 등장한 예수를 자기들의 종교 세계에서 제거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임을 안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와 오해가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전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겔은 하나님이 들어가신 성전의 동문이 닫혀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문이 닫혔다는 것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들어올 수 없도록 막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성소에 들어올 수 없는 자를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성소의 동문을 닫으신 것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닫힌 문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은 자에게만 열린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율법이 없는 유대인이 아닌 민족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지만 마음의 할례까지 포함된다면 유대인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롬 2:28-29절을 보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몸에 할례를 행한 것이 참된 유대인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몸에 할례를 행했다는 이유로 유대인이라 자부하는 그들이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겉만 유대인으로 행세할 뿐이고 그 내용은 전혀 유대인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창 17:10-11절을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말씀합니다. 이때는 이삭이 태어나기 전입니다. 이삭을 주시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의 후손이 지켜야 할 언약으로 할례를 주신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이삭은 인간의 정상적 육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존재하게 된 인물이며 따라서 그 후손 역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몸에 할례를 행한 것에만 중요성을 둠으로써 할례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간과한 채 몸에 할례를 행한 것을 하나님의 백성 된 증거로 여깁니다.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이 ‘할례를 행했느냐 행하지 않았느냐’라는 육적 기준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할례가 지워지거나 취소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 또한 지워지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언약이 지워지거나 취소되지 않는 것처럼 언약의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의 구원 또한 지워지거나 취소되지 않음을 잊지 말라는 조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몸의 할례와 함께 마음의 할례가 언급되는 것입니다.

 

 

신 10: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신 30:6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마음에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을 내용으로 한 믿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이 내용으로 자리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믿음이었고 오늘날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알지 못하고 몸의 할례만 아는 자에게서는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당연히 몸의 할례를 우월의 조건으로 여기고 몸의 할례를 행한 자신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이었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마음의 할례에 대한 규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흔적 자체가 없는 마음의 할례는 간과한 채 눈에 보이는 확실한 실천과 증거로 여기는 몸의 할례에만 의미를 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를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몸에 할례를 행해서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우리 역시 이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았는가?’를 묻고 받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스스로를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 간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마음과 몸에 할례 받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할례의 의미는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의 할례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마음의 할례는 과연 무엇을 잘라 버리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서 잘라낼 것이 있다 해도 우리 스스로 잘라낼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잘라낼 수 없는 것이라면 ‘마음의 할례를 행해라’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의 마음에는 수많은 죄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탐욕, 교만, 분노, 시기, 미움 등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죄의 흔적들을 자신의 의지로 마음에서 잘라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생을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쌓고 노력한다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성령을 받으면 가능할까요? 가능의 여부를 떠나서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서 그 같은 죄의 흔적들을 잘라내기 위해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마음에서 죄의 흔적들이 모두 제거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죄 없는 인간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세상에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을 유혹할 죄의 세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창조되었다면 영원히 죄 없는 인간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 없는 인간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 줄 착각한 사람들이 죄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결국 그것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 한다고 생각되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행동에서 선과 의를 찾고 그것을 우월하게 여기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그래서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의로 끌어 당겨서 자랑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애굽적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습성으로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온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결국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자신이 의를 행할 수 있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고, 신자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잘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벌거벗은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 바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열려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문이 정작 이스라엘에 의해 굳게 닫힌 것을 주목하면서 이스라엘이란 존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동쪽 문만 있습니다.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리며 제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었기에 에스겔 성전에서는 동쪽 문을 닫아 버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쪽 문이 닫힌 것에서 하나님은 성소에서 행했던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받지 않으시고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민족이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했다는 뜻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백성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을 이방인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판단할 자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방인으로 규정된 그들이 누구를 가리켜 더러운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저주 받은 자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성전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주목하면서 닫힌 문의 의미를 알게 된 신자에게서 드러나는 할례 받은 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 받은 자는 이렇게 드러납니다. 스스로를 하나님 백성 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드렸던 떡과 기름과 피도 하나님의 영광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었을 뿐임을 압니다. 다시 말해서 몸으로 행한 어떤 것도 의롭다고 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그가 할례 받은 자의 진정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차라리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리는 것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요? 어차피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 떡과 기름과 피를 드렸다 해도 성전을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문제는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백성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리는 행위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 더러움이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면서 거기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령 ‘나에게 이런 행함이 있고, 나의 성품이 이러하니 나는 신자답다’라는 생각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렸으니 나는 하나님의 백성답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자기 행함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전을 더럽게 할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성은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착각은 행함으로 성경이 불의하고 더럽다고 한 존재성이 달라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불의함은 그대로이지만 가치 있는 행함만 있다면 불의함은 조금씩 지워지고 대신 의로움이 채워진다는 기대가 착각이고 헛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너희는 성전을 더럽히는 이방인이다’는 것입니다. 닫힌 문을 주목하면서 그 사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유대인이시고 나는 이방인이라는 존재 파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으로만 된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만 되니까 예수님을 더 잘 믿자’가 아니라 지금까지 놓지 못했던 자신의 가능성을 놔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할례의 의미고 이러한 할례 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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