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04.23 17:49

(74강) 파수꾼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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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33:1-6http://onlycross.net/videos/eze/eze-33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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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3.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4.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5.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6.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설교>


대개의 사람은 자신의 삶을 ‘행복과 불행’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행복하다 하고, 반대로 힘들게 하는 나쁜 일이 있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당연히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신을 찾아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도 삶이 불행하다고 여겨지면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하고 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열심히 섬겼는데 왜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을 찾고 섬기는 인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며 우리 또한 동일한 속성을 드러내며 소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와 온갖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어떨까요? 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한탄하며 자기들과는 다르게 부요와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는 이방 나라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의 외침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선지자는 그 상황을 한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의 성취에 초점을 두고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으며 소망을 놓치지 않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에스겔을 포함한 모든 선지자들의 동일한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하여 말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에 있을 때는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좋은 일에 대한 기분 좋음의 표현에 더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본인을 힘들게 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시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은 에스겔 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말씀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없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낙심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분명 우리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현실의 모든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고통과 절망을 본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봤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현실에서 모든 상황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와 이스라엘의 다른 시각입니다.

 

 

본문에 보면 파수꾼에 대해 언급합니다. 파수꾼이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 차리지 아니하여 땅에 임한 칼에 제거를 당하면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파수꾼이 땅에 칼이 임한 것을 보고도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여 그 중의 한 사람이 칼에 제거 당한다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제거되지만 그 죄는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합니다.

 

 

7절에서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고 말씀하는 바와 같이 하나남께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운 사람은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입니다. 에스겔에게 ‘너 파수꾼 할래?’라고 에스겔의 의사를 묻고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삼았다’라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통보하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에스겔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 인간은 ‘왜 내 의사는 묻지 않으십니까?’라고 항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우심에 대해서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하는 것은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부터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 항상 반발하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시각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행동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 스스로의 의사와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언제나 자신에게 선이 되는 유익을 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겔 24:16,17에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고 말씀합니다.

 

 

에스겔이 기뻐하는 것을 빼앗으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에스겔의 아내를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입니다. 에스겔이 선지자로서 일을 잘못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에스겔이 슬퍼할 일을 행하시면서 슬퍼하거나 눈물 흘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인생에 있을 고통과 슬픔을 막아주고 평생 행복을 누리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고 섬겼습니다.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알고 의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착각이었음이 에스겔 선지자에 대한 조치로 드러난 것입니다.

 

 

겔 24:18절에서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라고 말씀한 것처럼 에스겔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종합니다.

 

 

이것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하시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 되었고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게 되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평생 슬픔과 고통이 없이 행복을 누려야 할 권리와 자격이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생각한다면 ‘나에게는 슬픔과 고통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지 않는 교만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고난의 길로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이 버리신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불만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아들을 버리시는 슬픔과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외침은 세상을 향해서 아들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버리시는 슬픔과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 백성을 찾으시고 생명에 있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 내게 슬픔과 고통이 되는 일이 있다 하여 원망과 불만을 내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알게 된 신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파수꾼으로 삼으신 파수꾼이 파수꾼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가 주지해야 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주어진 모든 상황을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속성으로만 바라볼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좋은 일이 있으면 행복하다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단지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파수꾼은 선지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가 파수꾼이었다면 신약 시대에는 누가 파수꾼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뒤로 하고 자기 목숨을 위해 도망 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죽자 정신을 차리고 시대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결의하고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가 세례 요한으로 끝났을 때 이 세상의 진정한 파수꾼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시대를 향한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칼이 임했음을 보시고 경고하셨지만 누구도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4절에서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 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경고를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임하는 칼에 의해 제거함을 당합니다. 이것이 파수꾼이신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도 정신 차리지 않은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 정신 차린 사람들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도무지 정신 차린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것을 기쁨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늘의 것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예수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세상을 향한 욕망이 온전히 끊어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은 압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피로써 용서하셨다는 사실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세상은 죄로 인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미 칼이 임했고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한 모든 자는 칼에 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게 된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했고 하나님에 의해 거룩한 자로 여김 받으며 생명의 나라에 속한 자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입혀진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라는 사실도 알고 나의 존재는 예수님을 벗어나서는 ‘영원한 사망’이 전부이기에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음도 믿습니다. 이것이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이 우리의 둔한 정신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경고로 정신을 차린 신자가 세상에 남겨진 파수꾼입니다. 선지자도 죽었고 사도도 모두 죽었습니다. 세상에 남은 것은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서 외쳐진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신자가 파수꾼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파수꾼이라고 하면 아마 ‘그럼 우리가 파수꾼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6절에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파수꾼이라면 나팔을 불어 경고해야 할 책임이 있고, 경고하지 않으면 그 죄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파수꾼이라면 어떻게 경고를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쩌면 거리에 나가 세상의 심판을 경고하는 전도지를 나눠준다거나 ‘예수 전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모습을 상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파수꾼의 사명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파수꾼의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7절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삼았다고 하시는데, 에스겔은 이미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는 말씀에서처럼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또 파수꾼으로 세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에스겔이 파수꾼으로 세움 받고 지금까지 경고의 말을 외쳤지만, 그들은 경고를 듣지 않고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상의 죄로 인해 자기들이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 다를 바 없이 심판의 대상으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허물과 죄로 죽는다는 말을 합니다(18절). 이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악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기뻐하심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파수꾼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이 같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전해야 하기에 또 다시 파수꾼으로 세웠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파수꾼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외칠 때 경고를 듣는 자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는 나의 허물과 죄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처한 본질적 위치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대신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반발합니다. 이것이 경고를 듣고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고 머리가 그리스도라면 교회는 이 시대에 파수꾼의 역할을 분명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일뿐이며 어떤 열심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행하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외쳐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 역시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자신의 본질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파수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산다고 해서 누가 깨닫고 예수님을 알고 회개하겠는가?’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을 도구로 이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신자는 다만 말씀 안에서 세상의 심판을 바라보며 기쁜 일에든 슬픈 일에든 동일하게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우치며 감사하게 되는 길로 가면 됩니다. 파수꾼은 내 인생만 생각하며 살던 나를 주를 생각하는 자로 살게 하신 주의 권능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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