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1.06 10:12

(101강) 선포되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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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7:1-12http://onlycross.net/videos/psa/psa-97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2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3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4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5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

6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7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8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9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12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설교>

 

환경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행복과 불행을 느낍니다. 그래서 누구나 좋은 환경을 원하지만 이런 기대는 항상 신기루 같은 환상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세상에 머무를수록 생생하게 느낄 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부르며 좋은 환경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는 좋은 환경을 주시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문에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안계시거나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 십상일 뿐입니다.

 

 

사실 신자가 주어진 환경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가를 알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즐거워하게 하고 기뻐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무엇이기에 우리를 즐거워하게 하고 기뻐하게 할까요?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문제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신자에게 좋은 환경을 주시는 것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내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을 위해 일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도 자신을 위해서 일하시고, 자기가 원하는 좋은 것, 좋은 환경을 주시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생각에 의해서 1절의 내용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신자에게 좋은 환경은 무엇이고 나쁜 환경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그렇게 나누어 구분할 수 있습니까?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하나님은 분명 택한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결코 나쁜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며 따라서 신자에게 나쁜 환경은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환경의 조건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됩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좋은 환경이 분명 따로 있지만 과연 그것을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에덴동산을 좋은 환경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에덴이라는 좋은 환경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게 보면 에덴동산을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탄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사탄이 존재하고 악한 권세에 장악되어 있는 세상을 좋은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삶의 조건이 편하고 좋다고 해도 결국 사탄의 권세로 다스려지면서 죄의 길로만 가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 이상적인 환경에 산다고 해도 죄의 권세 있음으로 해서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 세상에는 좋은 환경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만 편한 삶을 누리기를 추구하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현실을 외면하고 보이는 것만 누리고자 할 뿐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환경은 삶의 질과 조건을 따라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구름, 흑암, 불, 번개, 이런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3,4절의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배경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산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멸망의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좋은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의 끝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 모든 것은 허무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멸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그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운명에 놓인 인간에게 세상의 좋은 환경을 누리게 하는 것을 도무지 하나님의 일이고 다스림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구출된 이스라엘은 광야로 인도 받았습니다. 광야는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굽보다 더 못한 괴로움만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나쁜 환경이었을까요?

 

 

신 8: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낮추시고,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시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새로운 삶을 배우게 하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을 나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광야 자체를 두고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좋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 아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것이야 말로 이스라엘에게는 최상의 좋은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6절을 보면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절대성입니다. 심판에 갇힌 세상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결국 헛되다는 평가를 받을 것에 지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과연 무엇을 가치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고 생명에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선포되는 의로 인해서 신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게 되면 결국 자기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확대를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확대를 위해 신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의 특징이 ‘너에게 복을 주고 잘되게 해줄게’인 것입니다. 하지만 7절을 보면 우상을 허무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를 보장받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안정적인 노후입니까? 죽음을 가까이 한 얼마 안되는 세월을 안정적으로 편히 지낸다고 해서 그 삶을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삶으로는 영혼이 배부를 수 없습니다. 항상 더 좋은 것을 갈구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심판으로 인해서 의의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는 심판을 들을 때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주의 심판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심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의 세계로 부름 받은 자신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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