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1.20 09:58

(103강) 하나님의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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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9:1-9http://onlycross.net/videos/psa/psa-99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2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4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5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6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7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8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설교>

 

우리가 성경을 읽게 되면 거의 습관적으로 깊은 생각 없이 지극히 당연한 말로 쉽게 받아들여 버립니다. 가령 1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라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이러한 말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만민이 두려워하고 떠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민이 떤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를 묻는다고 쉽게 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하나님의 거룩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식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당연한 말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얘기할 수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기피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뭔가를 알아가고 바르게 나아가고자 하는 것보다는 쉽고 간단한 구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도 알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 믿고 복 받고 평안히 살다가 죽어서 천국가면 되는 것이 현대인이 추구하는 신앙생활의 구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풍성한 신앙의 세계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성경을 대할 때는 자신이 놓치고 있을 수 있는 풍성한 신앙의 세계를 새롭게 보고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보고 사는 삶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의 능력과 힘과 평안을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성경의 그 어떤 말씀도 당연하고 쉬운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놀랍고 힘 있는 신앙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말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99편을 보면 3절과 5절과 9절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거룩이 무엇일까요? 대개 보면 거룩을 세상과 구별하는 것으로 접근합니다. 세상은 속되고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접근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하는 것이나 세상의 문화 자체를 속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의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문화를 속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소위 기독교 문화는 거룩하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거룩이라는 용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현대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예배당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건물일 뿐이기에 거룩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라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니 그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도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라고 말하면서 경배의 이유를 하나님의 거룩에 두고 있고, 9절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경배와 예배의 근거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바른 찬송과 경배와 예배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찬송과 경배와 예배는 지극히 종교적이며 맹목적인 것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속된 것과의 구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풍습이나 문화를 속되다고 하지 않습니다. 속되다는 것은 더럽다, 부정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더러운 것으로 여기시는 것은 인간의 악한 속성입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 되어서 스스로를 책임지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럽게 여기시는 악한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세상 것을 소유하기 위한 집착이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어도 되지만 세상 것은 없으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스린다고 하지만 세상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게 보입니다. 여호와의 다스림과 무관하게 인간의 힘으로 존재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 소관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생명을 주관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에 조금이라도 접근을 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생각을 할 것이고 그 분에 대한 두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이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고 나올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신자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고 경배하고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고 말합니다.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여호와는 법궤를 의미합니다. 법궤 안에는 인간의 죄를 대표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을 행하십니다. 따라서 죄의 땅은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흔들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을 우리의 눈에 보인 대로 보고 판단하게 되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다스림도 실감할 수 없고, 세상 나름대로 굳건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죄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상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죄의 시각에서 볼 때 2절의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시기 때문에 당연히 위대하고 높으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시기에 위대할 수밖에 없고 높으실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시각에서 본 세상은 위태롭고 흔들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로만 가능합니다. 시온은 성전을 의미하고, 성전에는 그룹 사이에 좌정한 여호와, 즉 법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속죄일에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법궤에 뿌리는 것으로 죄가 용서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의 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생명의 문제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를 위대하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그 분이 우리를 지으셨고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신자인 우리에게 여호와의 이름은 크고 두려운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세상에는 없고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별되는 것이고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고 사랑이며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생명으로 인해 거룩한 자로 여김 받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이 무엇인지 아는 신자는 거룩한 자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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