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13.01.27 10:13

(104강) 감사와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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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0:1-5http://onlycross.net/videos/psa/psa-100010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설교>

 

시편 100편을 보면 그 주제가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개 보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문제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예배드릴 때 찬송을 부르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며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찬송은 노래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찬송과는 다르지만 구약 시대에도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찬송을 단순한 노래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노래를 하게 되는 그 이유에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내 마음에 담겨 있는 것이 표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에 대한 무엇이 담겨져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초점을 두고 찬송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시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고 또한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될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이기 때문에 그냥 흘러 지나갈 수 있지만 사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제는 1절의 내용부터 큰 걸림돌로 다가옴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까? 우리 상식대로 하자면 즐거운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으려면 뭔가 좋은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즐거운 찬송을 부르는 것은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저자가 그런 의미로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기쁨이 있기도 하고 슬픔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신자도 동일한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쁜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슬픈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모든 신자에게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 땅이여’라는 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즐거운 찬송은 자신의 형편이나 기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기 기분에 좌우되는 경향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 예배당을 찾는 것도 자기 기분에 좌우됩니다. 어떤 일로 인해 기분이 좋지 않으면 예배드릴 기분이 나지 않는다며 예배당을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를 예배당으로 인도하여 예배드리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기분이 예배당으로 인도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기분과 형편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찬송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즐거운 찬송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즐거운 찬송은 기쁨에 의한 찬송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좋은 일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기쁨은 하나님께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은 모두 우리의 생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생명과 무관한 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설사 주어진 일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고 해도 그 일은 생명과 연관되어 주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일하시는가의 문제로 마음이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나에게 두게 되면 하나님의 일보다는 나의 일이 더 큰 관심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보다 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중요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슬픈 일은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스러운 일은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절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리하지 마시고 이렇게 해 주십시오’라며 자기의 완악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즐거운 찬송이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기쁨으로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우리에게는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에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처한 형편만을 생각하는 것 때문에 사랑을 놓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고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할 당위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은 신앙에 있어서 당연한 내용으로 여기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 내용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내 것으로 간주할 뿐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을 하나님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으니 자신의 뜻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에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았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아픔과 고통의 형편에 처해진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알 때 즐거운 찬송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4절에서 말하는 감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감사해야 할 형편이나 조건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신자는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그 인생은 이미 형통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형통의 삶이며, 아픔과 고통의 형편에 처해진다고 해도 역시 형통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근본적인 내용이어야 하고, 이 내용으로 인해 감사와 찬송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감사와 찬송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입니다. 변덕이 없으시고 언제나 동일한 인자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과연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는지부터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면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아픔에도, 고통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픔과 고통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찾고자 한다면 관심을 생명의 문제에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픔과 고통의 일까지도 유익으로 다가옴을 알게 될 때 범사에 감사하며 즐거운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이 만족이 있음으로 감사와 함께 즐거운 찬송이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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