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6.10.29 16:40

(100강) 성소와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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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41:1-7http://onlycross.net/videos/eze/eze-4101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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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2.그 문 통로의 너비는 열 척이요 문 통로 이쪽 벽의 너비는 다섯 척이요 저쪽 벽의 너비는 다섯 척이며 그가 성소를 측량하니 그 길이는 마흔 척이요 그 너비는 스무 척이며

3.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는 두 척이요 문 통로가 여섯 척이요 문 통로의 벽의 너비는 각기 일곱 척이며

4.그가 내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스무 척이요 너비는 스무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5.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 성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너비는 각기 네 척이며

6.골방은 삼 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서른이라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하였으며

7.이 두루 있는 골방은 그 층이 높아질수록 넓으므로 성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질수록 성전에 가까워졌으나 성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래층에서 중층으로 위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

 

<설교>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보는 성전은 솔로몬 성전의 연장선에 있지 않습니다. 무너진 솔로몬 성전을 재건하라는 취지나 솔로몬 성전의 부족함을 채우라는 뜻에서 성전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솔로몬 성전으로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신 일이 곧 실패한 인간에게 의로움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함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에 담긴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성전은 서로 단절된 관계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행하심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과 믿음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어긋나면 굴러갈 수 없다거나 서로 협력관계에 있다는 말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하나님이 지으신 성전에서 인간의 손으로 지은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보게 하시는 이유를 짐작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신 일에 인간의 노력이나 실천이 개입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손으로 행한 일이 하나님께 영광 될 수도 없음을 보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솔로몬 성전의 것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2절에서 언급되는 성소와 4절에서 언급되는 지성소입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천으로 가려져 있는 지성소는 일 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몸에 피를 바르고 들어가야 합니다. 지성소는 거룩한 장소로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불의한 인간이기에 희생제물의 피로 죄가 가려지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죄는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의 피로 인해 용서되었기에 구약 방식의 제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소와 지성소가 존재하는 것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어떻게 자기 백성 되게 하시는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소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앙의 근원입니다. 성소가 존재하고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증된다고 믿었습니다.

 

 

왕상 8:10-11절에 보면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다윗성에 있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깁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지성소에 두고 성소에서 나왔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여호와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실재로 이스라엘은 성전을 그런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성전이 여호와가 계시는 처소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함께 하는 거룩한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영광은 언약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즉 언약궤로 인해서 여호와가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궤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시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이루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됩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싫증이 나도록 들으셨을 것입니다. 싫증이 나도록 들으셨다는 것은 제 임의로 본문과 상관없이 그러한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셨음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왕상 8:9절에 보면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고 말합니다.

 

 

언약궤 안에는 두 돌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돌판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모세가 넣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언약궤에 넣은 두 돌판은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 온 원래의 돌판이 아닙니다. 원래의 돌판은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섬기는 것을 보고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든 것이 언약궤에 넣은 돌판입니다.

 

 

출 34:27-2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고 말씀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뜻을 세우시고 이루시기로 확증하신 일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이 확증하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심으로 이스라엘을 의의 영광에 참여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말씀 앞에서 자신들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죽음의 존재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의 성전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제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건축했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현대 교회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면서 크고 화려하고 멋있게 건축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하여 인간이 자기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일 뿐입니다.

 

 

성전에서의 여호와의 영광은 언약궤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궤가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겠다는 언약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궤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있음으로 자신들이 영광된 존재가 되는 줄로 알았고 자기들의 손으로 들고 나온 제물과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관계가 유지되고 지켜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이 무너지고 성소와 지성소가 그들에게서 사라졌을 때 절망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솔로몬의 성전에 있던 성소와 지성소를 보게 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성소와 지성소가 솔로몬의 성전에 있던 것은 맞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물론 크기도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솔로몬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에 있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소에는 떡을 놓는 상과 불을 켜는 등잔대와 향을 피우는 금 향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성소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습니다. 또한 솔로몬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본문의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이 없습니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져 있지 않은 채 다만 성소와 지성소라는 공간으로만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성전 안의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성소와 지성소를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성소와 지성소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떡을 가져다 놓지도 못하고 불을 키지도 못하며 향을 피우지도 못합니다. 무엇보다 언약궤가 없으니 제물을 잡는다 해도 그 피를 가져갈 곳이 없게 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킴으로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깨어져야 할 이유라는 사실이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는 것으로 증거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보여준 새로운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에 언약궤를 포함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것은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인간이 지켜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지킬 수 있는 존재조차도 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성전의 지성소에 언약궤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거룩해지는 방식인 옛 언약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을 더 이상 지키고 이루어야 할 것이 없는 완성의 세계에 있게 하신다는 새 언약 아래 있게 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말씀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천사를 통해서 새로운 성전으로 데리고 가셔서 성소와 지성소를 포함한 성전의 모든 것을 보여주시는 것은 새로운 성전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새 언약이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고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자가 인자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인자는 고난 받는 자라는 뜻인데 에스겔이 고난 받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장에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왼쪽으로 누워 390일을 지내고 그 날이 끝나면 오른쪽으로 누워 40일을 지내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390년 동안의 죄와 유다의 40년 동안의 죄를 에스겔이 짊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기간 동안에는 밀, 보리, 콩, 팥, 조,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아 보리떡처럼 만들어 인분 불에 구워서 하루 이십 세겔씩 먹으라고 합니다. 이십 세겔이면 220그램이 조금 넘는 양인데 성인 남자가 하루에 이십 세겔 무게의 떡을 먹으면서 430일을 지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만 겨우 연명하는 수준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에스겔이 짊어지게 하셔서 그 같은 고난의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에스겔은 아내가 죽어도 슬퍼하고 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에스겔을 인자라고 하시고 새로운 성전으로 이끌어 가신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새로운 성전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새 언약이 인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작되고 완성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누가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될까요? 그들은 바로 새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된 그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의 피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면서 의를 이룰 수 없는 죽은 자임을 알게 되며 언약의 완성자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굴복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을 백성 되게 하기 위해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것이 새로운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시고 이루신 세계를 뜻합니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할 수 없는 세계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그는 여전히 실패한 이스라엘의 길을 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히 9:11-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손으로 행한 것과 상관없는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온전한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영원한 속죄가 우리의 온전함이 되는 복된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자기의 손으로 이루는 일에 관심 두지 않습니다. 아예 자기 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온전해졌다는 것이 믿음으로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이 창조에 속한 일일 뿐입니다. 이 창조에 속한 것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거나 구원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이 창조에 속한 것, 다시 말해서 우리의 손으로 행한 것에 관심두지 않게 됩니다. 신자의 믿음은 예수님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에 의해서 자기 손으로 이룰 것은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해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증거 하되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영원한 속죄 앞에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은 가치 없음도 함께 증거 해야 합니다. 자기의 손으로 행한 일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 곧 예수의 피로 이루신 영원한 속죄를 믿지 않는 것임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에스겔이 보는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인간이 행할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는 것이 새로운 성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인자로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고난의 길로 가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새 언약인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널판자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으며 각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성전의 벽들이 모두 그룹과 종려나무로 새겨져 있습니다. 계 7장에 보면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 인이 휜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외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성전의 벽에 새겨진 그룹과 종려나무는 어린양의 피로 죄 씻음 받고 깨끗하게 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성전은 인간의 손으로 행하고자 이루고자 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며 이것이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에스겔의 입장에 되어서 천사를 따라 하나님의 성전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으로만 보기 때문에 실감할 수 없지만 측량된 성전을 그 크기대로 재현을 한다면 그 규모와 크기에 입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전에서의 우리의 관심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에서 나의 실패를 배워야 합니다. 나는 죽은 자라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와져야 하고 하나님이 인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신 그 일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고 영광에 참여하게 함으로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됨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나는 부인되고 예수님의 피만이 심령에 자리하게 됨으로써 생명이 하늘에 속한 자로서의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은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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